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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선수시절54] 이명화' 한국 여자축구의 시작점

2011-12-02 00:00:00 6,393

한국 여자축구의 시작점이었던 이명화 ⓒ이상헌



한국 여자축구가 본격적으로 태동한 것은 1990년이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처음 구성된 여자대표팀은 그 해 9월 6일' 일본과의 경기를 통해 첫 공식경기를 치렀다.

무려 1-13으로 패하며 첫 발을 내딛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달았던 그 한일전에서 이명화는 만 17세의 여고생 신분으로 출전했다. 이명화는 이렇게 한국 여자축구의 태동과 함께 했고' 이후 10여년간 부동의 공격수로 맹활약을 펼쳤다. 그녀는 A매치 81경기에 출전해 10골을 넣었으며' 90년부터 2002년까지 네 번의 아시안게임과 1991년부터 여섯 차례의 AFC 여자 아시안컵' 2003년 미국 여자 월드컵 참가 등 화려한 이력을 남겼다. 한 마디로 이명화는 한국 여자축구의 1세대를 대표했던 선수였다.

축구를 좋아했던 여고생' 펜싱 선수에서 축구 선수로 전향

어릴 때부터 운동신경이 좋았던 이명화는 펜싱 선수로서 성장했다. 경북체중과 경북체고를 거치면서 펜싱 선수로서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김주성을 좋아했던 이명화는 가슴 한 구석에는 항상 축구 선수로서의 길을 꿈꾸고 있었다.

"1986년쯤이었던 것 같은데' 김주성 선수의 갈기머리가 너무 좋았어요. 그리고 친 오빠가 볼을 찼기도 했고요. 당시에는 여자축구가 없었는데' 언젠가는 생길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죠. 그래서 혼자 축구 교본을 보면서 밤에 훈련하곤 했어요. 밭에서 드리블 훈련도 하고요.(웃음)"

펜싱 선수로 맹훈련을 하는 와중에도 이명화는 저녁에 항상 축구공을 들고나가 개인훈련을 하며 축구 선수로서 나설 날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기회는 1990년에 찾아왔다. 국내 최초로 강일여고에서 여자 축구부를 만든다며 선수 모집 공고를 냈던 것. 당연히 이명화는 달려갔다.

"경북체고 2학년 때였는데' 선수 모집 공고를 보자마자 짐 싸서 찾아갔어요. 원래 펜싱부 감독님께 테스트 받고 오겠다고 하자 절대 안 된다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몰래 도망쳤죠.(웃음)"

테스트를 받은 이명화의 실력은 단연 최고였다. 다들 초보여서 간단한 패스 훈련 등만 하는 상황에서 이명화는 다양한 패스와 드리블에 리프팅도 40~50개를 하며 발군의 실력을 보였던 것. 혼자 꾸준히 개인훈련을 했던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당시 강일여고는 전문적으로 축구를 했던 분이 아니라 체육주임 선생님이 감독을 하고 계셨어요. 당장 오라고 하셔서 다시 경북체고로 내려갔는데' 거기서는 절대 못 보내준다고 했죠. 3개월을 끌다가 간신히 전학을 갈 수 있었어요."




1999년 AFC 여자 아시안컵에 참가할 당시의 이명화(7번 주장완장) ⓒKFA 홍석균



곧바로 여자대표팀 선발' 베이징 아시안게임에 나가다

강일여고에서 축구부 생활을 하자마자 이명화에게 대표 선수로서의 기회가 찾아왔다.
베이징 아시안게임에 여자축구가 처음으로 포함되었고' 여기에 참가할 여자대표팀이 구성된 것. 대표팀 테스트를 받은 이명화는 박경화 감독의 인정을 받아 팀 동료인 골키퍼 박현주와 함께 최연소로 합류하게 됐다.

"핸드볼 등의 다른 종목에서 뛰던 언니들이 모였어요. 아무래도 제가 나이가 어리니까 감독님이 미래를 생각하고 뽑아주신 것 같아요. 6월에 처음 소집해서 3개월 훈련하고 9월 말에 열린 아시안게임에 출전했죠."

이명화는 언니들 틈에서 곧바로 주전 자리를 꿰찼다. 체력과 스피드가 워낙 뛰어났고' 펜싱 선수를 했던 탓에 순발력도 좋았다. 매일 밤 개인훈련을 했던 탓에 볼에 대한 감각도 좋았다. 그녀는 등번호 7번을 받고' 라이트 윙으로 나섰다.

"처음 대표팀에 갔을 때 걸음마 단계인 언니들도 있었고' 저처럼 혼자 볼을 찼던 언니들도 있었어요. 핸드볼 등을 했던 언니들은 빨리 습득하고 발전하더군요. 그래도 초보는 초보였죠. 당시에는 초등학교 남자 축구팀과 연습게임을 해도 크게 지곤 했어요. 그냥 볼 있는 곳으로 우르르 몰려다니고 그랬으니까요.(웃음)"

"그래도 그 언니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한국 여자축구가 있는 것이에요. 제 경우는 어렸기 때문에 계속 축구를 했지만' 그 언니들은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축구를 그만두셨죠."

여자대표팀은 베이징 아시안게임에 참가하기 전' 동대문운동장에서 일본과 두 차례 친선경기를 치렀다. 한국 여자축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결과는 참패였다. 1990년 9월 6일 열린 1차전에서 강귀녀가 한 골을 넣었지만' 1-13으로 대패했다. 3일 뒤 2차전에서도 0-5로 패했다. 이명화도 경기에 나섰으나 일본의 벽을 느껴야만 했다.

"그냥 시간이 빨리 갔으면 하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볼이 와도 앞으로 연결시키기보다는 아웃시키는 게 더 많았죠. 제가 공격수였지만' 수비하기 바빴어요."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참가하는 국제대회에서 여자대표팀은 쓴 맛을 단단히 봤다. 9월 27일 열린 북한과의 1차전에서 0-7패' 일본과의 2차전에서 1-8패' 대만과 중국에게도 0-7' 0-8로 대패했다.

"국제대회가 처음이었는데' 신기하더군요.(웃음) 여자도 저렇게 축구를 잘하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어떻게든 실점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저도 수비에 가담하느라 하프라인을 거의 못 넘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도 여자대표팀은 홍콩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1-0으로 승리하며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다. 이 승리는 여자대표팀의 공식 경기 첫 승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이명화는 한은경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며 역사를 만드는데 일조했다.

"매 경기 대패하니까 선수촌에 들어오면 창피했죠. 빨리 시간이 흘러서 귀국하기만을 기다렸고...그런데 홍콩을 보니까 우리와 수준이 비슷하더라고요. 한번 해보자는 의욕이 생겼죠. 그리고 그 경기에서 제가 어시스트해서 은경 언니가 결승골을 넣었어요. 정말 기분 좋았죠."

"아시안게임 끝나고 남자대표팀과 함께 곧바로 북한으로 가서 남북통일축구를 했어요. 남자와는 달리 여자는 격차가 너무 컸기 때문에 남북한이 반반씩 섞어서 경기를 펼쳤어요. 수준 높은 북한 선수들과 함께 뛰니까 우리 수준도 높아지면서 확실히 편하더군요. 당시 북한 감독님은 어린 제가 재능이 있다면서 북한으로 넘어오라고 농담을 하시기도 했어요.(웃음)"




인천제철(현 현대제철) 시절의 이명화가 숭민의 이지은과 대결을 펼치고 있다. ⓒKFA 홍석균



1993년 AFC 아시안컵에서 A매치 데뷔골 터뜨리다

이명화는 이듬 해인 1991년 일본에서 열린 AFC 여자 아시안컵에 참가했지만' 태국과 대만' 중국에 패하며 성과 없이 마쳤다. 그리고 2년 뒤인 1993년 여자 아시안컵에서 말레이시아를 4-0으로 대파하며' 홍콩전에 이어 4년여 만에 승리를 맛봤다. 그리고 이명화는 말레이시아전에서 2골을 터뜨리며 A매치 데뷔골까지 기록했다.

"연습게임 때는 골을 많이 넣었지만' 공식경기에서는 처음이잖아요. 대표팀에서의 첫 골인데다가 팀도 승리했었기 때문에 정말 기분이 좋았죠. 뭐 이후 열린 중국' 북한에게는 다시 대패했지만..(웃음) 격차는 좁혀졌지만' 안 되더라고요. 그래도 후회나 좌절은 하지 않았어요. 우리는 함께 했던 시간들이 길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쫓아가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이후에도 여자대표팀은 2000년대 초반까지 계속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지만' 그 와중에도 조금씩 발전하기 시작했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3전 전패를 당했지만' 95년 아시안컵에서는 일본에 아쉽게 0-1로 패했고' 우즈베키스탄과 인도를 6-0' 5-0으로 대파하기도 했다. 4강전에서 중국에 패했지만' 3-4위전에서도 대만과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아쉽게 패했다.

이명화 개인적으로는 1992년 숙명여대로 진학하지만' 1년 만에 팀이 해체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다행히 경희대로 편입해서 축구를 계속 할 수 있었다. 물론 현재는 경희대도 여자 축구팀을 해체한 상태. 이후 이명화는 인천제철(현대제철)에 입단해 간판 스타로 활약했다. 그리고 예전부터 동경의 대상이었던 김주성과 유사한 스타일로 '여자 김주성'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원래 김주성 선수의 플레이를 좋아해서 축구를 하게 된 것이잖아요. 거기에다가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당시에 사람은 튀어야 한다면서 김주성처럼 해보라고 조언하셨죠. 그래서 헤어 스타일도 비슷하게 했고' 플레이도 닮으려고 노력했어요. 측면에서 저돌적으로 1대1 돌파를 시도하는 면이 비슷해서 '여자 김주성'이란 별명도 얻은 것 같아요."




2001년 토토컵에서 우승하고 기쁨을 나누고 있는 이명화 ⓒKFA 홍석균



2000년 이후 미드필더로의 변신..2003년 여자 월드컵 참가의 감격

2000년이 지나면서 이명화는 미드필더로 보직을 변경했다. 20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파워와 스피드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스트라이커보다는 노련한 경기 운영이 필요한 미드필더로 이동한 것.

새로운 포지션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 이명화는 2002 부산 아시안게임을 거쳐 2003년 태국 방콕에서 열린 AFC 여자 아시안컵에서 축구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됐다. 그 해에 미국에서 열릴 FIFA 여자 월드컵 출전권이 걸린 이 대회에서 여자대표팀은 북한과 2-2로 비겼고' 3-4위전에서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던 일본을 1-0으로 꺾으면서 극적으로 여자 월드컵 출전권을 획득했다.

"2000년대 들어오면서 대만은 이기게 됐어요. 그리고 북한' 일본 등과도 어느 정도 대등한 경기를 할 수 있게 되었죠. 개인적으로는 공격수에서 미드필더로 옮겼는데' 저는 오히려 더 재미있더군요. 2선에서 파고들어가는 것이나 전방에 스루패스 넣어주는 것이 즐거웠어요."

"2003년 아시안컵은 잊을 수 없죠. 일단 모두가 하나로 뭉쳤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물론 감독을 싫어하는 선수도 있을 수 있고' 감독이 싫어하는 선수가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이런 경우가 많다보면 그 팀은 반드시 실패해요.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와 선수가 서로 믿어야만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이 대회를 통해 깨달았죠. 당시 안종관 감독님과 새롭게 김상진 코치님이 오셨는데' 중간에서 김상진 코치님이 좋은 분위기를 유도해주셨어요."

이 대회 북한전에서 이명화는 선수 생활 최초로 퇴장을 당했다. 그리고 일본과의 3-4위전에서는 공격수 박은선이 퇴장 당하는 악재도 있었다. 그럼에도 여자대표팀은 월드컵 티켓을 따냈다.

"북한전에서 제 축구인생 최초의 퇴장을 당했죠. 후배들 얼굴을 못 보겠더라고요. 다행히 2-2로 비겨서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어요. 일본전에서는 전반에 (황)인선이가 선제골을 넣고 1-0으로 리드하고 있는 상황에서 후반 교체 투입된 (박)은선이가 들어가자마자 퇴장을 당했어요. 난감했죠. 그래도 어떻게든 이겨야 한다는 생각에 10명이서 버텼어요. 기적처럼 막아냈고' 승리를 지켰죠.(웃음)"




2003년 AFC 여자 아시안컵 북한전에서의 이명화 ⓒKFA 홍석균



2003년 미국 여자월드컵의 기억

어렵게 월드컵 출전권을 획득한 여자대표팀. 이명화로서도 일생일대의 꿈이 실현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처음 맛본 세계축구는 아직 한국 여자축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여자대표팀은 브라질에 0-3으로 완패했고' 프랑스에 0-1패' 그리고 노르웨이에게는 1-7로 대패했다.

이명화도 막상 월드컵 본선에서는 후보로 밀렸고' 프랑스와의 2차전에서 후반 30분이 교체 투입되어 15분여를 뛰었던 것이 전부였다.

"처음 참가하는 월드컵은 정말 대단했어요. 일단 관중들이 엄청났죠. 그렇게 많은 관중 속에서 뛰는 것 자체가 새롭고 놀랍고 즐거웠어요. 물론 실력 차이가 많이 나다보니까 크게 지긴 했어도 그 분위기는 좋았던 것 같아요."

"당시에 (김)결실이가 신예로 떠오르고 있었는데' 젊고 체력적으로 강하고 많이 뛰는 스타일이라 제 자리에서 뛰게 됐어요. 항상 주전으로 뛰다가 벤치에 앉아있으니 자존심이 상하긴 하더군요.(웃음) 그런데 그 때의 경험도 소중했어요. 벤치에 앉아 경기를 보다보니 후보 선수들의 마음을 왜 몰랐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경기를 다른 시야로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인터뷰 중인 이명화 ⓒ이상헌



너무나 쓸쓸했던 은퇴

미국 여자월드컵을 마치고' 이명화는 2004년 서울시청으로 이적했다. 이 무렵에는 미드필더에서 수비수로까지 내려왔다. 어찌 보면 이것마저도 그녀의 우상인 김주성과 동일한 길을 걸었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수비수로서도 크게 활약했던 김주성과 달리 이명화는 힘든 시기를 겪어야 했다.

"사실 공격수는 계속 못하다가도 한번 골을 넣으면 인정을 받아요. 그런데 수비수는 열 번 잘하다가도 한 번 실수하면 욕을 먹죠.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큽니다. 더군다나 수비수는 제 성격과 맞지 않았어요. 수비수는 기본적으로 차분하고 침착한 성격을 갖고 있어야 해요. 그런데 저는 모험적으로 하는 스타일이죠. 수비수와는 맞지 않는 성격이었어요. 나이가 들어서 공격이나 미드필드에서 활용하기는 힘들고' 노련하니까 수비수를 시킨 건데 저와 맞지 않았죠."

그렇게 서울시청에서 수비수로 뛰며' 플레잉 코치 역할을 했던 이명화는 그 해에 일방적으로 은퇴 통보를 받았다. 아직 지도자에 대한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기에 당황하고 서운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그래도 여자축구 태동기부터 간판 선수로 계속 뛰어왔잖아요.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나이 들어 체력 떨어지고 실력 떨어졌다고 버려진다고 생각하니 가슴 아팠어요. 제가 나름대로 여자축구를 위해 공헌한 것도 있는데' 앞으로의 계획을 세울 시간은 주고 은퇴를 시켰어야죠."

"전국체전 끝나고 숙소에 있는데' 면담도 아니고 그냥 전화상으로 현역 은퇴하고 강일여고 감독으로 가라고 통보를 받았어요. 물론 선수로 뛰면서 지도자 자격증도 땄고' 플레잉 코치를 하긴 했지만' 지도자로서의 준비가 제대로 되어있지도 않은 상황에서 나가라는 이야기를 들은 거죠. 너무 서운했어요."

결국 이명화는 공식 은퇴식도 없이 그렇게 현역 생활을 마무리했고' 강일여고 감독을 거쳐 2005년부터 고양시 여성축구단의 감독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여러 가지로 마음고생이 많았지만' 지금은 축구를 가르치는 것 자체만으로 행복하다며 웃음 지었다.

그녀가 꿈꾸는 미래도 결국은 축구다. 어린 여자 유망주들을 키우면서 축구와 함께 사는 것이 이명화의 소박한 꿈이다.

"처음에는 억울하고 서운한 마음도 많았지만' 지금은 제가 좋아하는 축구를 가르치면서 살 수 있어 그것만으로도 행복해요. 고양시에서도 많은 지원을 해주고 있고요."

"언젠가는 유소녀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은 하고 있어요. 작년 U-17 여자월드컵 우승과 U-20 여자월드컵 3위를 하는 것을 보면서 여자축구가 정말 많이 성장했다는 것을 느끼고 기분 좋았거든요. 그러나 저변을 살펴보면 정말 열악해요. 요즘 어린 연령대들은 더 심각하고요."

"예전 현역 시절에 일본 전지훈련을 자주 갔었는데'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저녁이 되니까 부모님들이 자기 딸을 데리고 와서 축구를 시키는 거예요. 부모님들은 딸이 축구하는 것을 지켜보며 만족스러워하고' 아이들은 행복하게 웃으면서 자유롭게 볼을 차더군요. 언젠가는 한국에서 저런 풍경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죠. 어쨌든 평생 여자축구를 떠나지는 못할 것 같아요.(웃음)"


글=이상헌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11년 11월호 '나의 선수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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