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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선수시절43] 황보관' 한국축구 최고의 캐논슈터

2010-12-27 00:00:00 8,585

캐논슈터로 명성을 떨쳤던 황보관 ⓒ오이타 트리니타



황보관(43)이라는 이름과 함께 항상 떠오르는 것이 '캐논슈터'이다.
90년대 축구스타였던 황보관은 파괴력과 정확성을 동시에 갖춘 킥 능력을 바탕으로 여러 차례 멋진 프리킥 골을 선보였고' 그로 인해 '캐논슈터'라는 별명을 얻었다. 특히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스페인전에서 터뜨린 그의 장거리 프리킥 골은 한국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멋진 골이었다.

황보관은 90 이탈리아 월드컵 출전을 비롯해 A매치 36경기에서 10골을 기록했고' K리그에서는 1988년 유공(현 제주)에 입단해 95년까지 활동하면서 총 171경기에 나서 44골-27도움으로 활약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오이타 트리니타에서 선수와 코치' 감독' 부사장까지 역임하면서 '오이타맨'으로 활약했고' 현재도 오이타의 감독으로 재직 중이다. (올 시즌이 끝난 뒤 감독직 사임 -편집자 주)

▲ 운동신경 뛰어났던 소년' 초등학교 6학년때 축구 입문

어릴 때부터 운동신경이 탁월했던 황보관은 대구 침산초 6학년 때 축구에 정식으로 입문했다. 그가 축구하는 모습을 본 학교 선생이 축구부 가입을 권유했던 것. 공부도 잘했고' 학급반장도 하던 막내를 축구 선수로 키우기는 싫었던 어머니의 반대도 있었지만' 결국 축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제가 운동신경이 조금 있었거든요.(웃음) 제가 6학년 때 축구를 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축구부 가입을 권유하셨죠. 그것이 축구와의 첫 인연입니다.'

이후 황보관은 계성중과 계성고를 거쳤고' 고1때 서울체고로 전학을 가게 됐다. 축구 유학과 비슷한 케이스였다. 낯선 서울로 축구 유학을 온 황보관은 외로움 속에서도 자신의 기량을 꾸준히 발전시켰고' 고교무대에서는 꽤나 유명한 선수로 성장했다.

'초중고 시절에는 주로 스트라이커로 많이 뛰었어요. 그 때를 회상해보면 개인기가 제법 괜찮았고' 스피드도 빨랐던 것 같습니다. 어릴 때부터 동네 조기축구회(생활체육축구팀)에 나가 어른들과 볼 차고 그랬던 기억도 나네요.(웃음) 다만 그 무렵에는 킥 능력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어요. 킥 능력을 갖춘 것은 프로 입단 이후였죠.'

'청소년대표팀에 선발되지는 못했지만' 고교 3학년때 대표상비군에는 뽑혔었죠. 고교축구에서는 그래도 제법 잘하는 선수로 알려졌던 것으로 기억해요.'

▲ 서울대로 진학하다

서울체고를 졸업한 황보관은 1984년에 서울대로 진학했다. 당시 체육특기자가 아닌 동일계 진학케이스로 입학했고' 1학년 시절 약체였던 서울대를 대학선수권 준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사실 몇몇 축구 명문 대학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었어요. 그런데 서울대로 진학한 것은 선생님이 되기 위해서였죠. 당시만 해도 축구 선수로 성공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선생님을 꿈꾸고 있었거든요.'

'당시의 서울대는 지금보다는 강했지만' 그래도 대학대회에서 항상 예선 탈락했던 팀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입학할 무렵에는 김종환 선배를 비롯해 축구를 전문적으로 했던 선수들이 몇 명 있었어요. 강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른 대학 팀들이 만만하게 볼 수는 없을 정도였죠. 학교 다니면서 전국대회 준우승도 했고' 어느 정도 성적을 냈던 것 같아요.'

서울대에서 성과를 내면서 황보관도 인식을 바꾸게 되었다. 주위에서도 프로 무대에 도전해 볼만 하다고 이야기했고' 실제로 프로팀에서도 관심을 표명했다. 특히 대학 4학년 시절 대표B팀에 선발되어 남미 원정을 다녀오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그 무렵부터 선배들이나 주위에서 너는 프로 선수가 되겠다고 말씀해주셨죠. 관심을 보이는 프로팀들도 있었고요. 그리고 대학 4학년 때 대표B팀에 선발되었는데' 그 팀에 프로에 있는 선배들이 많았거든요. 함께 뛰면서 나도 프로에 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1988년 K리그 신인왕을 수상한 황보관 ⓒ월간축구



▲ 1988년' 유공에 입단..신인왕의 영광..그리고 대표팀 발탁

기세를 탄 황보관은 1988년 서울대를 졸업하고 유공(현 제주)에 입단했다. 당시 유공을 지도하던 김정남 감독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이에 보답하듯 황보관은 데뷔하자마자 주전을 꿰차며 23경기에 출장' 7골-5도움이라는 호성적으로 신인왕과 베스트11을 수상했다. 최고의 데뷔였던 셈.

'처음에는 서울대 선수가 얼마나 잘하겠냐는 인식이 팽배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자신 있었어요. 대학 4학년때 대표B팀으로 남미 원정을 다녀오면서 자신감이 생겼죠. 프로라도 내 실력만 발휘한다면 통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거든요. 신인왕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정말 겁 모르게 열심히 뛰어다녔던 것 같아요. 결국 신인왕도 받게 됐죠.(웃음)'

K리그에서 환상적인 실력을 뽐낸 황보관은 당연히 대표팀에 선발됐다. 대표B팀이 아닌' 1988년 카타르에서 열린 AFC 아시안컵에 참가하는 A대표팀이었다. 당대 최고의 선수들과 호흡을 맞출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K리그에서 데뷔 시즌을 잘 치르고' 팀에서도 주축 선수가 되면서 정신 없었어요. 그런 와중에 대표팀에 뽑혔다고 하니 더욱 정신없었죠.(웃음) 사실 최순호 선배가 빠진 자리에 들어간 상황이었기 때문에 저에게는 기회였지만' 한편으로는 부담감으로 다가오기도 했어요.'

'당시 저는 경험이 적은 어린 선수였기 때문에 망아지처럼 정신없이 보냈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표팀에서도' 소속팀에서도 인정을 받으면서 좋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죠.'

아시안컵에 참가하게 된 황보관이었지만' 당대 최고의 선수들 틈에서 신예 선수가 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주로 벤치를 지켰던 황보관은 3연승 이후 이란과의 4차전에서 선발 출장 기회를 잡았다. A매치 데뷔전이자 이 대회에서의 유일한 출장이었다.

'너무 오래 전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당시 약간의 부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대표팀에 뽑히긴 했지만 거의 훈련도 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런 상황에서 이란전에서 한 경기를 뛰었는데' 그다지 인상 깊은 활약은 펼치지 못했습니다.'




88년 아시안컵 대표팀에 선발된 황보관(아랫줄 정중앙) ⓒ월간축구



▲ 최고의 순간 - 90 이탈리아 월드컵 무대를 밟다

88년 아시안컵에서 이렇다할 활약을 펼치지 못했던 황보관이었지만' 89년 후반기부터 시작된 90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는 맹활약을 펼쳤다. 특히 사우디 아라비아전에서 터뜨린 30m 대포알 프리킥 골은 황보관의 별명을 '캐논슈터'로 만들어준 계기가 되었다.

'싱가포르에서 최종예선을 했는데' 다들 아시아에서 한 가닥씩 하는 팀들이었잖아요. 당시 북한과 중국을 꺾고 2연승인 상태에서 사우디를 만났는데' 상당히 중요한 경기였죠. 그런 경기에서 프리킥으로 제대로 된 골을 넣었으니까 정말 기뻤죠. 제 별명인 캐논슈터가 나오게 된 계기였기도 했고요.(웃음)'

'한 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당시 싱가포르가 비가 많이 오니까 제가 한국에서 뿔창 축구화를 갖고 갔는데' 그 축구화에 문제가 있어 신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현지에서 급하게 구입했는데 값이 아주 싼 축구화였어요. 다행스럽게도 그 축구화로 프리킥 골을 넣었던 것이죠. 그런데 질이 떨어지는 축구화라서 경기 끝나고 나서 밑창이 뜯어졌더라고요.(웃음)'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을 무패로 여유 있게 통과한 대표팀은 드디어 월드컵 무대로 향했다. '아시아 최강'으로서 월드컵에 나선 대표팀에 대한 기대는 그 어느 때보다 컸다. 첫 월드컵을 맞이하는 황보관 역시 기대감이 부풀어 이탈리아로 향했다.

'사실 그 때만 해도 월드컵이 얼마나 크고 세계적인 무대인지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냥 막연하게 월드컵에 나가게 되어 너무 좋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월드컵이 다가오면서 뉴스 등을 통해 많이 부각되면서 점차 부담감이 생기더군요. 상대도 잘 모르고' 얼떨떨하게 갔는데' 경기력은 세계와 큰 차이가 있었어요.'

벨기에와의 1차전. 황보관은 스타팅 멤버에서 제외되어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봤다. 그리고 대표팀은 벨기에를 상대로 2골을 내주며 0-2로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경기 이틀 전까지만 해도 제가 스타팅 멤버로 알고 훈련했었어요. 그런데 경기 당일에 상대에 따른 전략적인 면으로 인해 바뀌었죠. 솔직히 조금 억울한 것은 있었습니다.(웃음) 제가 선이 굵고 많이 뛰는 스타일이거든요. 유럽 원정에서도 그렇고 평가전에서도 잘했었고요. 그런 면에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아쉬움이 있었죠. 전반 끝나고 워밍업을 할 때 허정무 당시 트레이너께서 나갈 수 있으니 준비하라고 하셨는데' 여러 상황으로 인해 결국 나가지는 못했어요.'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참가한 황보관(왼쪽에서 두 번째) ⓒ월드축구



▲ 스페인전 - 대포알 프리킥 골!

벨기에전이 끝난 뒤' 대표팀의 분위기는 많이 가라앉았다. 아시아 최강이라는 칭호와 함께 다크호스로 불렸지만' 내용과 결과에서 모두 실망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맞이한 스페인과의 2차전. 이 경기에서 황보관은 선발 출장해 측면을 담당했다.

선수들은 심기일전' 강호 스페인에 맞섰으나 역시 경기력의 차이는 존재했다. 전반 22분에 미첼에게 선제골을 내주며 끌려갔다. 그런 상황에서 황보관의 대포알 프리킥이 빛을 발했다. 전반 43분' 최순호가 살짝 내준 볼을 그대로 달려들며 오른발 슛을 시도했고' 이것은 스페인의 골망을 완벽하게 흔들었다. 1년 전' 아시아 최종예선 사우디전에서 넣었던 프리킥 골과 거의 흡사한 환상적인 골이었다.

'스페인전을 위해 경기장에 나서는데 정말 떨리더군요. 애송이가 월드컵에 뛰게 됐으니 얼마나 떨렸겠어요.(웃음) 다행히 워밍업을 하고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진정이 됐어요.'

'경기 자체는 거의 대등하게 진행됐는데' 미첼에게 1골을 내주고 말았죠. 전반 끝날 무렵에 볼을 빼앗아 제가 최순호 선배에게 연결했고' 그 상황에서 상대 파울로 프리킥을 얻었어요. 예전 사우디전에서 골 넣었던 위치와 비슷해서 느낌이 좋았죠. 스페인 골키퍼가 최고라고 평가받는 수비사레타였는데' 골을 넣겠다는 것보다는 골문 안쪽으로 보내겠다는 생각으로 찼죠. 그런데 킥을 하는 순간에 발등에 제대로 얹힌 느낌이 들더군요.(웃음)'

이 프리킥 골은 90 이탈리아 월드컵 전체를 통틀어서도 최고의 프리킥 골 중 하나로 평가받을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114km의 속도 역시 당시까지의 월드컵에서 기록된 가장 빠른 슈팅 기록이었다. 대표팀 자체는 후반에 미첼에게 2골을 더 헌납해 1-3으로 패했지만' '캐논슈터 황보관'의 명성은 더욱 확고해졌다.

'저로서는 영광이죠. 선수로서 월드컵에서 골을 넣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것이잖아요. 지금이야 후배들이 월드컵에서 골을 많이 넣었지만' 당시만 해도 골 자체가 많지 않았고요.(웃음) 어쨌든 저에게는 평생 자랑할 만한 골이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제가 원래 킥이 좋은 선수는 아니었어요. 초중고 때도 그렇고' 대학에서도 합숙하고 자취하면서 잘 먹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프로에 가니까 먹는 것부터가 많이 달라졌어요. 잘 먹고 체계적으로 훈련하다보니까 체중도 늘고 파워와 탄력도 늘었죠. 제가 원래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몸이 뒷받침해주자 좋은 킥이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간단하게나마 킥에 대한 조언을 한다면 집중력이 가장 중요해요. 자신의 킥에 대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이 정말 중요하고' 그 이미지에 따라 스타트부터 킥을 하는 순간까지 100% 집중해서 연결 동작을 가져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후 우루과이전에서도 선발 출장했던 황보관은 결국 0-1로 패하면서 아쉽게 월드컵을 마무리했다. 한국축구로서는 실망스러운 월드컵이었지만' 황보관에게는 소중했던 무대였다.

'우루과이전의 경우 승리하면 골득실 등 여러 상황에 따라 16강에 진출할 수도 있었어요. 또 우루과이는 한 번 해볼 만한 상대였기도 했고요. 실제로 좋은 경기를 펼쳤죠. 전반에 제가 돌파하는 과정에서 페널티킥을 불만한 상황도 있었는데 넘어갔고' 후반에 윤덕여 선배를 퇴장시킨 것 등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죠.'

'그 때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월드컵에 나갔고' 프로에서 하던 것처럼 야생마처럼 뛰어다녔던 것 같아요. 만약 한 번 더 나간다면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회택 감독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지금 제가 지도자가 되고 보니까 당시에는 상대에 대한 정보도 너무 부족했고' 우리의 컨디션 조절도 실패한 측면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이탈리아 도착 자체가 너무 늦었으니까요. 지금 생각하면 많이 아쉬운 부분이죠.'

▲ 94 월드컵에 대한 희망..그러나 좌절

90 이탈리아 월드컵 이후에도 황보관은 꾸준한 활약을 펼쳤다. K리그에서도 유공의 간판 스타로서 활약하면서 팀을 이끌었다. 특히 1994년에는 28경기에 나와 15골-7도움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보여주면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 무렵에는 경험도 많이 쌓이고' 잔부상에서도 회복되어 최고의 상태였습니다. 소위 말하는 축구 보는 눈이 트이기 시작했다고 할까요. K리그에서도 더 자신있게 플레이할 수 있었고' 94 월드컵에 한 번 더 도전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어요.'

그러나 황보관의 월드컵에 대한 꿈은 거기서 멈춰야 했다. 94 미국 월드컵 아시아 1차예선까지는 10번 등번호와 함께 대부분의 경기에 선발출장하며 주축 선수로서 인정을 받았지만' 이후 최종예선과 월드컵 본선에서는 그의 이름을 볼 수 없었다. 황보관에게도 가장 아쉬움으로 남는 시기였다.

'아쉬움이 많이 남죠. 솔직히 말하면 선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결국 안됐거든요. 특별히 슬럼프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한 번 더 월드컵에 나가보고 싶다는 의지로 열심히 했었죠. 그리고 사실 선수로서 축구의 맛을 가장 느끼고 있었던 시기였기도 했고요.'




오이타맨으로 활동했었던 황보관 ⓒ오이타 트리니타



▲ 오이타에서의 새로운 도전

2회 연속 월드컵 출장이 좌절된 황보관은 1995년에도 30경기에 나서 9골-5도움으로 좋은 활약을 펼쳤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일본의 오이타 트리니타로 이적해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당시 오이타에는 故 문정식 감독이 사령탑을 맡고 있었고' 서울대 시절 은사였던 박경호 고문도 있었다. 그들의 권유로 황보관은 일본행을 결심했다.

'선수 생활을 오래 하면서 한번쯤은 해외에 나가보고 싶다는 갈망이 생겼었죠. 공부도 좀 더 해야 할 것 같았고요. 그래서 처음에는 미국 메이저리그(MLS)로 가려고 했었는데' 그 무렵에 제도상의 문제로 인해 메이저리그 출범이 1년 늦춰지게 됐어요. 그런 상황에서 오이타에서 와달라고 요청이 왔고' 은사인 박경호 감독님과 문정식 감독님도 계시고 해서 가게 됐죠.'

'96년과 97년' 2년간 선수 생활을 했는데' 돌이켜보면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고 축구만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일본의 축구 수준이 아주 높지 않았기 때문에 골도 많이 넣었고요.(웃음)'

97시즌을 마치고 현역 은퇴를 한 황보관은 이후 AFC의 지도자 코스를 모두 밟았고' 최상위 레벨인 'P코스(프로페셔널 코스)'까지 이수하며 지도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1999년 조영증 감독(현 KFA 기술교육국장)이 이끌던 U-20 대표팀 코치로서 잠시 한국에 돌아왔던 것을 제외하고는 줄곧 오이타에서 팀 운영의 중심 역할을 수행했다. 수석코치와 감독' 유소년 육성부장' 선수 강화 육성부장' 부사장 등을 거쳤고' 다시 오이타의 감독을 맡았다가 올 시즌을 끝으로 사임했다.

'당시에는 일본의 시스템을 좀 더 공부해보고 싶었고' 또 축구와 관련된 정보가 일본에는 많았거든요. 그런 부분들을 공부하고 나서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어느덧 세월이 이렇게 흐르고 말았네요.(웃음)'

▲ 한국에서 완성된 그림 그리고 싶어

'오이타맨'으로서 15년을 보냈지만' 황보관의 최종 목표는 한국으로 돌아와 지도자 생활을 하겠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그는 지도자로서' 그리고 팀 운영자로서도 많은 경험을 쌓았고' 그런 활동들을 통해 느끼고 배운 부분들이 많았다. 그런 부분들을 한국축구에 긍정적인 도움을 주는 쪽으로 기여하고 싶다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이제 저도 나이를 어느 정도 먹었고' 한국으로 돌아갈 시점이 온 것 같습니다. 저도 준비를 많이 했고' 많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잘할 자신도 있고요. 단순히 지도자 뿐 아니라 팀 운영에 대한 부분도 많은 노하우를 쌓았거든요. 그런 것들을 한국에서 풀어놓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번 제대로 된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고 해야 할까요. 지도자로서 세계적으로 칭찬받을 수 있는 그림을 한번 완성해보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인터뷰=이상헌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10년 12월호 '나의 선수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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