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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선수시절42] 김정남' 60년대 한국축구를 대표했던 수비수

2010-11-24 00:00:00 9,346

60년대 한국축구의 수비를 책임졌던 김정남(현 프로연맹 부회장) ⓒKFA 홍석균



축구인 김정남(67)은 한국축구계에서 누릴 수 있는 대부분의 영광을 맛본 주인공이다.
그는 1962년부터 국가대표로 활약해 1974년에 은퇴할 때까지 한국 최고의 수비수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동료 김호(66)와 호흡을 맞춰 '아시아 최고의 수비 콤비'로 인정받았다. 현역 은퇴 후에도 청소년대표팀과 국가대표팀 코치와 감독을 역임하면서 능력을 발휘했고' 1986년과 88년에는 대표팀을 이끌고 86 멕시코 월드컵과 88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기도 했다.

프로팀 감독으로서도 활약을 펼친 김정남은 1985년 유공(현 제주)의 감독을 시작으로 1998년에는 중국 산동 루넝과 청도 중넝' 그리고 2000년부터 8년간 울산의 감독으로 재직하면서 지도력을 발휘했다. 또한 1993년부터 98년까지는 KFA의 전무로' 2010년부터는 프로축구연맹 부회장을 맡으면서 축구행정에 있어서도 폭넓은 활동을 벌였다. 그야말로 축구계 전반에 걸쳐 다양한 활동을 펼쳤던 셈이다.

동네 골목에서 시작한 축구

유년 시절 김정남은 하루 종일 축구와 함께 살았다. 동네 골목에서 친구들과 볼을 차며 축구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정식으로 축구부에 가입해 축구를 한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축구를 즐기고 기술을 익힐 수 있는 시기였다.

"동네 골목에서 친구들과 축구를 하며 하루를 보냈었죠. 유리창이나 기와장도 많이 깨먹었습니다.(웃음) 그리고 은로초 6학년 때는 반대항 축구대회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애들 모아서 팀을 만들기도 했고요. 동네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축구에 빠져있었던 시절이에요."

김정남의 축구사랑은 보성중에 진학한 이후에도 식을 줄 몰랐다. 여전히 동네에서 축구를 즐겼던 그는 점심시간에도 학교 운동장에서 볼을 차면서 축구와 함께 했다. 보성중에서도 반대항 축구대회에 나갔던 김정남은 그것을 계기로 좀 더 본격적인 축구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항상 좁은 곳에서 볼을 차면서 연습했기 때문에 실력이 많이 늘었어요. 정식 선수는 아니었지만' 여러 명이 몰려들어 빼앗으려고 해도 볼을 잘 빼앗기지 않을 정도였죠. 키핑력과 기술이 많이 좋아진 것인데' 이런 것들이 나중에 축구 선수로서 생활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죠."

"보성중에서도 반대항 축구대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제 플레이를 보고 지금은 작고하신 고계성 선생님께서 축구를 해보라고 권유하셨어요. 선생님께서 보성중 유니폼과 함께 축구화도 주시길래 신나서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당시 중고축구는 1-2부로 나눠져 있었고' 보성중은 2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1부가 좀 더 치열하게 본격적인 축구를 한다면 2부는 동아리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보성고 역시 2부 소속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김정남은 좀 더 높은 레벨의 축구를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좀 더 축구에 전념하고 싶었고' 더 높은 수준의 축구를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축구명문이었던 한양공고에서 테스트를 받고 전학을 갔죠. 잘하는 선수들도 워낙 많은 강팀이었어요. 보성고가 2부 팀이라 동아리 같은 분위기였다면 한양공고는 매일 훈련하고 강도도 강했죠. 처음에는 훈련을 따라가기도 벅찰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축구를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왔기 때문에 열심히 했어요."

보성고 시절 공격수였던 김정남은 한양공고로 오면서 미드필더나 풀백으로 뛰기 시작했다. 워낙 쟁쟁한 선수들이 많았던 터라 그는 처음에 후보 신세를 면하기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 김정남에게 천금 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주전 풀백 선수가 경기를 며칠 앞두고 심한 감기몸살에 걸리면서 그에게 출장 기회가 왔던 것이다. 그리고 김정남은 그 기회를 멋지게 살렸다.

"팀 훈련도 열심히 했지만' 훈련이 끝난 뒤에도 항상 몇 사람씩 모여 개인훈련을 했어요. 한양공고 운동장이 작거든요. 좁은 공간에서 3:3이 되든' 4:4가 되든 훈련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기술도 세밀해졌죠. 페인팅으로 남을 속이는 것도 굉장히 재미있었고요.(웃음) 또 수비하면서 남이 볼을 갖고 있을 때 덤벼서 빼앗기도 하고' 속기도 하면서 수비에서의 요령도 생겼던 것 같아요."

"그런 상황에서 저에게 갑자기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어요. 다행히 제가 나서서 괜찮은 플레이를 펼쳤고' 이후 계속 주전으로 뛰게 됐죠.(웃음) 그리고 다음 해 4월에는 U-19 대표팀에도 선발되었고' 8월에는 대표2군이긴 했지만 어쨌든 성인대표팀에 뽑혀 메르데카배에도 나가게 됐죠. 정말 한순간에 행운이 찾아온 느낌이었어요.(웃음)"

김정남은 임국찬' 박인선' 나윤식' 주민환 등과 함께 4월 태국에서 열린 제4회 AFC U-19 챔피언십에 참가했고' 이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이어 8월에 대표팀의 일원으로 메르데카배에도 참가하게 됐다. 이 때가 1962년이었다.

"사실 고3인데 대표팀에도 뽑히니까 어린 마음에 우월감과 자만심이 생겼어요. 제가 무척 잘하는 줄 알았죠. 그런데 국제대회에 나가보니까 저보다 잘하는 선수가 너무 많더군요. 처음에 한양공고에 와서 받았던 충격과도 비슷했어요. 더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이들을 따라잡을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65년 메르데카배에 참가했을 당시의 김정남(아랫줄 왼쪽에서 두번째) ⓒ한국축구백년사



국가대표팀에서 입지 구축..도쿄 올림픽의 좌절

한양공고를 졸업한 김정남은 1963년에 고려대로 진학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A대표팀에서도 활약하기 시작한 김정남은 1964년 도쿄 올림픽을 통해 세계의 벽과 마주하게 됐다. 한국은 동구권의 강호 체코 슬로바키아와 세계 최강 브라질' 중동의 아랍공화국과 경기를 치렀고' 처절한 아픔을 맛봤다. 체코와의 첫 번째 경기에서 1-6으로 대패했고' 이어 브라질전에서 0-4패' 그리고 아랍공화국에 0-10으로 참패하면서 쓸쓸히 귀국해야 했다.

"당시에 저와 이이우라는 선수가 막내였어요. 함흥철' 우상권' 차경복' 조윤옥' 허윤정 선배님 등이 계셨는데 다들 대선배셨죠. 김삼락 선배님이 저희보다 조금 위 연배셨고요. 같은 팀이라 선생님이라 부르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형님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애매했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어쨌든 도쿄 올림픽에 나갔는데' 성적이 정말 처참했죠. 언론과 팬들의 실망도 커서 한국축구에 대한 우려도 많이 나왔어요. 제 스스로도 '내가 이 정도밖에 안되나.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라는 실망감이 정말 컸었죠. 더 분발해야 한다는 각오도 새롭게 다졌고요."

"저는 당시 체코전에서 풀백을 봤고' 브라질전에는 나오지 못했고' 아랍공화국전에서는 미드필더로 나왔습니다. 특히 아랍공화국전에서는 골 넣을 기회가 있었는데' 순간적으로 더 좋은 위치의 선수를 찾다가 주지도 못하고 슈팅도 하지 못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아쉬움이 남는 순간이었죠. 그 이후로 지도자가 된 이후에도 항상 선수들에게 웬만하면 슛을 시도하라고 주문하곤 했습니다.(웃음)"




1970년 아시안게임에서 버마(현 미얀마)와 공동우승을 차지했을 당시 ⓒ한국축구백년사



'아시아 최강 김정남-김호 콤비'의 결성

도쿄 올림픽을 경험으로 한층 성숙해진 김정남은 대표팀의 일원으로 메르데카배와 킹스컵 등에서 수비의 중심 역할을 맡았고'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특히 1966년부터는 '아시아 최고의 수비 듀오'로 평가받았던 김호와의 만남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이들은 최고의 호흡을 보여주면서 견고한 수비망을 구축' 아시아 무대를 호령했다. 김정남이 스위퍼 역할을 맡으면서 뒤에서 커버 플레이를 하면' 앞에서는 김호가 스토퍼로서 상대 공격수를 무력화시켰다.

"사실 저도 그랬지만' 김호도 원래 풀백 요원이었어요. 그러다가 대표팀에서 둘다 중앙으로 배치됐고' 서로 조화가 잘 맞았죠.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만 해도 스위퍼 시스템이 유행이었거든요. 제가 뒤에서 스위퍼를 보고' 김호가 앞에서 스토퍼 역할을 했어요. 나중에는 김호의 뒤통수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알 수 있을 정도가 되었죠."

"둘이 호흡을 맞추면서 아시아 최강수비라는 칭호도 받았고' 우승도 많이 했어요. 물론 김호와 저는 성격 면에서는 많이 달랐습니다. 선수 때야 지도자의 요구사항에 충실히 따르는 것이 기본이었기 때문에 별로 다를 것이 없었지만' 지도자가 된 후에는 각자의 색깔이 묻어나오기 시작하니까 달라졌죠. 제가 조용한 스타일이었다면 김호는 좀 더 직선적이고 강한 면이 있었어요. 각자의 길이 조금씩 달랐고 스타일도 차이가 있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친했고' 좋은 콤비였습니다."




1967년 양지 시절의 김정남(아랫줄 맨 오른쪽) ⓒ한국축구백년사



번번이 막혀버린 세계로의 길

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축구는 아시아의 강자로 자리매김했지만' 이상하게도 세계로 나가는 길목에서 번번이 발목을 잡히곤 했다. 1965년 열렸던 잉글랜드 월드컵 아시아예선에서는 막강한 전력을 자랑했던 북한이 두려워 아예 불참했고' 67년에는 일본에 골득실에서 밀리며 멕시코 올림픽 진출에 실패했다. 이어 1969년에는 호주의 벽에 막혀 멕시코 월드컵 진출이 좌절됐다. 1970년 아시안게임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을 제외하고는 아쉬움이 남는 시기였다.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예선은 지금 생각해도 아쉽습니다. 마지막 경기에서 호주를 이겼으면 우리가 진출하는 것이었죠. 호주는 체격도 크고 태클 사정거리도 아시아 선수들과는 달라서 여러 가지로 힘든 점이 있었어요. 그렇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기회가 있었죠. 마지막 호주전에서 스코어가 1-1인 상황이었고' 마지막에 페널티킥을 얻었죠. 그런데 그것을 못 넣으면서 결국 탈락했어요."

"뮌헨 올림픽예선도 아쉬움이 커요. 우리가 가끔씩 말레이시아에게 덜미를 잡히곤 했었는데' 하필 올림픽예선도 포함됐었죠. 홈에서 열린 경기였는데' 수중전이었거든요. 전반 초반에 기습적으로 1골을 허용한 이후에 완전히 일방적인 경기를 펼쳤지만' 결국 골문을 열지 못하면서 0-1로 졌어요. 지금 생각해도 우리가 상당히 실력이 있는 팀이었고' 우리 전력이라면 도쿄 올림픽 이후에도 여러 차례 올림픽이나 월드컵을 나갈 기회가 있었는데' 이상하게 말리곤 했었습니다."

그 와중에 북한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8강 신화를 달성했고' 이에 자극받은 한국 정부는 최고의 엘리트 팀인 양지를 창단하기에 이르렀다. 마침 김정남은 고려대를 졸업하고 1966년에 해병대에 입대했고' 67년 1월에 창단한 양지 팀에 입단하게 됐다. 멤버 면에서 사실상 대표팀과 다름없었던 양지는 최고의 지원을 통해 전력 강화를 꾀했고' 심지어 105일간의 유럽 원정까지 떠났다.

"북한이 월드컵 8강에 오르면서 정부에서 자극을 받았던 거죠. 중앙정보부에서 양지를 만들었는데' 당시 저는 해병대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가 차출됐어요. 양지에서는 대우나 환경이 정말 좋았죠. 최초로 유럽 원정도 갔었고요. 군 복무가 끝난 후에도 더 머물었었죠. 이유야 어찌됐든 그 덕분에 한국축구가 많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흐지부지되면서 팀이 사라지게 되었죠.(웃음)"

1971년 대표팀 은퇴' 호주로 떠나다

1970년대로 넘어오면서 김정남은 잦은 부상으로 고생했다. 결국 그것으로 인해 김정남은 1971년에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외환은행에서는 선수 생활을 계속했던 그에게 당시 장덕진 KFA 회장은 호주 유학을 권유했고' 김정남도 지도자 교육을 받는다는 생각에 호주로 떠났다.

"원래 저는 지도자 교육을 받으러 가는 것으로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도착하고 보니까 선수로 뛰는 것이었더군요.(웃음) 선수하면서 지도자 교육도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뛰었는데' 호주 선수들 체격이 대단하잖아요. 올 거면 좀 더 젊을 때 왔어야 했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그래도 1년간 잘 뛰었고' 전력이 약한 팀이었음에도 2부리그로 떨어지지 않으면서 성공적으로 시즌을 마쳤습니다."





1976년 대표팀 코치 시절의 김정남(맨 오른쪽) ⓒ한국축구백년사



1974년 현역 은퇴..본격적인 지도자의 길로 들어서

1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김정남은 외환은행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다가 1974년에 은퇴했다. 그리고 은퇴하자마자 U-19 대표팀 코치로 발탁되면서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1975년 함흥철 감독 밑에서 대표팀 코치를 시작해 77년 최정민 감독 체제에서도 대표팀 코치로서 활동했다. 80년대 초반까지 대표팀 코치로 꾸준히 활동했으며' 중간 중간 감독이 공석일 때 감독대행으로서의 역할도 맡았다.

그리고 1985년 3월에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86 멕시코 월드컵 진출을 달성했고' 86 아시안게임 금메달도 획득하면서 명성을 떨쳤다. 이후 88 서울 올림픽대표팀 감독을 역임했고' K리그에서도 유공(1983~1992년)과 울산(2000~2008년) 등에서 감독 생활을 했다. 뿐만 아니라 KFA 전무(1993~98년)와 프로축구연맹 부회장(2010년~) 등을 통해 축구행정에서도 큰 역할을 수행했다.

"돌아보면 어렵고 힘든 과정도 있었지만' 행운도 따랐던 것 같습니다. 저를 조용하고 부드럽게만 보시겠지만'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경기가 열리기 훨씬 전부터 제 나름대로 준비했었고' 지지 않겠다는 승부 근성도 남몰래 갖고 있었어요. 제 나름대로 기술 습득을 했고' 경기에 대한 나름대로의 분석과 스스로에 대한 평가도 내리면서 발전하려고 애썼죠. 나름대로는 축구인으로서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중인 김정남 ⓒ이상헌



인터뷰 말미에 그는 어린 후배 선수들에 대한 따뜻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아시아 최고 수비수였던 만큼 좋은 수비수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지막으로 어린 선수들에게 좋은 수비수가 되기 위한 조언을 하자면' 일단 수비수도 기술을 갖춰야 합니다. 수비수가 기술을 갖고 있으면 상대 공격수의 기술과 생리에 대해서 미리 대비할 수 있어요. 그리고 수비에서 공격으로 이어지는 과정도 훨씬 매끄럽게 만들 수 있죠."

"또 항상 상대할 팀과 공격수에 대해서 분석하고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즘은 시대가 좋은 만큼 상대에 대한 분석 자료를 많이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우리 때만 해도 경기가 시작된 이후에야 상대를 파악하고 대처할 수 있었죠. 상대의 스피드와 즐겨 쓰는 발' 주로 움직이는 방향' 플레이의 장단점을 미리 파악하고 있다면 훨씬 수비하기 편해져요."

"그리고 항상 상대가 볼을 잡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최선의 수비예요. 미리 예측하고 좋은 위치를 잡는 것도 중요하고요. 그것이 실패했을 경우에는 빨리 압박해서 우리 문전으로 돌아서지 못하게 하고' 그것도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한쪽으로 몰아서 덜 위험한 지역으로 유도해 동료들이 협력수비를 하러 오는 시간을 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부분을 단계적으로 할 수 있는 판단력이 필요해요."

"무엇보다 수비수로서의 볼 뺏는 기술을 끊임없이 터득해야 합니다. 연습과정에서 계속 시도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실수가 나온다 해도 개의치 말고 해나가야 해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실전에서는 좋은 수비를 할 수 있습니다."


인터뷰=이상헌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10년 11월호 '나의 선수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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