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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선수 시절 74] 허정무' 집념이 탄생시킨 또 한 명의 슈퍼스타

2014-02-03 00:00:00 7,704

1985년 한일전에서 역사적인 결승골을 넣은 허정무 ⓒ한국축구100년사



지금은 행정가로 변신한 허정무(60) KFA 부회장은 현역 시절 ‘진돗개’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고향이 전라남도 진도군인 것도 이유지만' 그보다 진돗개처럼 포기할 줄 모르는 승부근성 때문이었다.

축구를 시작한지 4년만에 태극마크를 달았고' 유럽의 명문 PSV 아인트호벤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32년만에 대한민국을 월드컵에 진출시킨 주역이 바로 허정무였다. 허정무는 시대를 대표하는 슈퍼스타였다.

연세대 1학년때부터 성인 무대를 주름 잡은 허정무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을 마친 후 명예롭게 은퇴했다. 이후 지도자로 변신해 포항' 전남' 인천에서 후배들을 지도했고' 2010년에는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남아공 월드컵에서 사상 최초의 원정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축구 위해 상경한 겁 없는 진도 소년

그의 프로필에는 그 어디에도 중학교 이전의 경력을 찾을 수 없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서는 선뜻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다고 한다.

“69년 1월 17일에 축구를 시작했어요. 진도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축구를 하기 위해 서울의 중동중학교를 들어갔어요. 중동중에서 축구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진도에서는 학교 대표 육상 선수도 했었다. 운동에 소질이 있었지만 축구를 늦게 시작한 것은 그를 연습벌레로 만들었다.

“패스' 킥' 컨트롤부터 배운 거예요. 배우는 걸로 부족하니까 혼자 개인 운동을 많이 했죠. 새벽에 몰래 나가서 가로등 밑에서 리프팅 연습하고' 계단도 뛰고' 줄넘기도 했어요. 들어와서 숙소 벽시계를 보면 새벽 3시~4시였던 적도 있었어요. 그러면 잠깐 잤다가 팀이 일어날 때 같이 일어나서 새벽 훈련을 한 적도 있어요.”

중동중에서 1년을 배운 허정무는 영등포공고로 옮긴 유판순 감독을 따라 영등포공고로 진학한다. 그는 영등포공고에 가기 위해 영도중을 1년 더 다니며 기본기를 쌓아야 했다.

2년 동안 기본기를 훈련한 허정무는 자신도 모르게 훌쩍 성장했다. 고교 1학년때부터 기대주로 평가 받으며 수 많은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2학년이 되자 청소년 대표팀에 선발되기에 이른다.

“우승을 정말 많이 했어요. 그때는 대회가 1년에 10개 이상 있었는데' 결승에 올라간 것만 7~8번 됐죠. 스트라이커도 보고' 윙도 봤는데 골을 많이 넣었죠.(웃음)”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영향이 컸어요. 브라질에 펠레' 리베리노' 토스타오' 자일징요 같은 선수들이 있었거든요. 결승전에서 이탈리아를 4-1로 이기는 게 처음으로 텔레비전에 중계가 됐어요. 특히 자일징요를 보면서 개인 연습을 많이 했어요.”

자일징요는 드리블이 대단한 측면 공격수였다. 허정무는 자일징요의 슬로우 영상을 연구하여 몸에 익혔다고 한다.




29회 전국축구대회에서 - 뒤에 있는 선수가 허정무 ⓒ한국축구100년사



5년만에 국가대표팀 입성' 세대 교체 선봉장

허정무는 고3이 되자 ‘아시아 U-20 청소년 선수권대회’에 출전했다. 우리 U-19 대표팀은 준결승에서 홈팀 이란에 0-1로 패해 3위에 그쳤다. 허정무는 고등학생임에도 좋은 활약을 했다.

청소년 대표팀에서의 활약으로 그는 대학팀의 영입 0순위에 올랐다. 하지만 이미 연세대 입학이 결정된 상황. 연세대의 라이벌 고려대는 부산에서 열린 시도대항 청소년 대회에서 허정무 영입에 열을 올렸다. 허정무는 고려대와 함께 50일 정도 훈련을 했으나 주변의 만류로 원래 예정됐던 연세대로 진학했다.

연세대의 허정무' 박종원' 이강민은 실업팀도 겁내는 트리오 공격진으로 유명했다. 미드필드에는 조광래' 신우성 같은 선수들이 받쳐 주기도 했다. 하지만 우승을 많이 하지는 못했다. 허정무가 국가대표팀에 소집돼 있는 시간이 길었기 때문이다.

“74년 12월에 킹스컵 대회가 있었는데' 이회택 선배가 부상으로 빠지는 바람에 제가 선발된 거예요. 최재모' 박이천 등 대선배님들이 계셨는데 모두 저를 ‘막내야~’라고 부르셨죠. 태국하고 결승전을 했는데 제가 교체 출전해서 세 번째 골을 넣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홍콩에서 4개국 친선대회를 했어요. 킹스컵에서는 교체로 뛰었는데' 홍콩에서는 전 경기를 주전으로 뛰었죠. 거기서 굉장히 잘 했고' 그 팀이 바로 돌아와서 화랑 팀이 탄생한 겁니다. 이듬해 5월에 박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가 열렸는데' 그때부터 세대 교체된 멤버가 나간 거예요.”

부진했던 대표팀을 대학생으로 대체한 획기적인 세대교체였다. 허정무가 선봉장으로 이영무' 조영증과 같은 선수들이 대표팀에 이름을 올렸다. 허정무는 여전히 최연소 대표선수였다.

재미있는 일화는 대표팀에 많은 선수를 내준 연세대가 교외 활동 금지령을 내리며 신경전을 벌이는 일도 있었다. 연세대는 대표 선수들을 모두 불러들였고' 대한축구협회는 앞으로 연세대 선수를 안 뽑겠다며 맞불을 놨다. 허정무는 연세대에 대학 축구대회 우승을 안긴 후 조용히 대표팀으로 복귀했다.




1976년 국가대표팀 - 가운데 줄 가장 왼쪽이 허정무 ⓒ한국축구100년사



78년도 3관왕' 아시아를 호령한 진돗개

당시 국가대표팀은 막강했다. 거의 대부분을 국가대표팀에서 보내다 중요한 경기가 없을 때만 소속팀에 올 수 있었다. 허정무는 대학 생활보다는 대표팀 생활이 더 많았다.

“선수촌 생활이 대부분이었죠. 시간이 있으면 나와서 강의를 듣고 했습니다. 대표팀은 그냥 일년 내내 소집하는 상황이었어요”

‘우 범근' 좌 정무’의 시대였다. 세계의 흐름에 발맞춰 4-3-3 포메이션이 주를 이루었고' 허정무는 차범근과 함께 공격의 중추로 활약했다. 최전방에는 김재한과 같은 장신 공격수가 배치돼 측면에서의 크로스를 마무리하는 전술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차범근의 공간 돌파 능력은 굉장히 뛰어났어요. 저도 돌파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으니까 양쪽 공격 라인이 상당히 좋았죠.”

대표팀 생활을 하며 대학 4년을 보낸 허정무는 1978년 한국전력에 입단했다. 대학 최대어였기 때문에 영입전이 뜨거웠지만 그의 마음은 확고했다.

“포항제철에서 영입 제의가 많았어요. 대표 선수들도 대부분 포항에 있었을 때였고 대우도 좋았는데 선뜻 내키지가 않았어요. 저는 형님이 한국전력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한전을 갔죠. 고대에 있던 김강남' 김성남과 같이 입단했어요.”

한국전력에서는 많이 뛰지 않았다. 6개월 뒤 해병대에 입대했을 뿐 아니라 국가대표로도 활약했기 때문이다. 당시는 육' 해' 공군에서 각각 한 팀씩 축구단을 운영하던 시기였다.

“해병대에 가서도 대표팀에 주로 있었어요. 그때는 충의(육군) 멤버들이 굉장히 좋았어요. 박성화' 최종덕' 김호곤' 이영무' 이강조' 조광래가 다 충의에 있을 때예요. 그런데 우리한테는 한번도 못 이겼죠. 공군에는 차범근이 있었고요.”

1978년은 대표팀의 전성기였다. 세대교체가 자리를 잡으며 선수단의 호흡이 절정에 달했고' 선수 개개인의 능력도 무르익을 시기였다.

“78년도에는 3관왕을 했어요. 박대통령배' 메르데카배' 아시안게임까지 나가는 대회마다 우승을 했죠. 대통령배에서는 화랑과 충무로 나눠서 나갔는데' 충무는 대표 2진이라고 할 수 있었죠.”

차범근이 독일로 이적한 것도 78년 3관왕을 차지한 직후였다. 차범근의 유럽행은 탄탄대로를 달리
던 허정무를 자극했다.




1983년 PSV 방한경기에서 열렬한 환호를 받는 허정무 ⓒKFA



화제의 결혼' 그리고 네덜란드로의 이적

허정무는 해병대 소속으로 1979년 대통령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등 최정상급 기량을 유지했다. 실업축구 최우수 선수상은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꾸준히 받아오던 ‘한국 축구 베스트 11’에도 어김 없이 선정됐다. 한국 무대는 좁았다.

이듬해 그는 유럽 이적을 결심했다. 또한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기도 했다. 그의 피앙세는 당대 최고의 미녀 방송인 최미나였다.

“원래 약혼만 하려고 했는데 뉴스가 터지는 바람에 결혼을 빨리 한 거예요. 보안을 지켰어야 했는데 언론이 감지하는 바람에 약혼식이 아수라장이 됐어요. 정오 뉴스에 터져 버리고…”

이적도 긴박하게 추진됐다. 스페인'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등에서 영입설이 나왔고' 결국 독일과 네덜란드의 초청장을 받고 유럽으로 향했다.

“PSV 아인트호벤과 빌레펠트의 초청장을 받아서 갔어요. 그런데 실제로 테스트를 받은 곳은 보쿰이었어요. 쾰른 공항으로 갔는데 관계자가 미리 나와 있더라고요. 보쿰에 가서 훈련을 했는데 일주일만에 계약을 하자는 거예요. PSV와도 약속이 돼 있어서 일단 가계약만 했죠.”

“그리고 네덜란드에 가니까 마음이 홀가분했죠. 그래서 딱 한 경기만 하겠다고' 거기서 판단하라고 했죠. 그런데 PSV에서도 계약을 원했고' 환경이 너무 좋아서 계약을 한 겁니다.”

PSV 아인트호벤에서의 생활은 힘들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PSV는 네덜란드 대표 선수들이 득실거렸다. 입단 초기에는 교체로 뛸 수 밖에 없었는데 생전 처음 겪는 일이었다. 게다가 통역도' 심지어 에이전트도 없었다.

“힘들었죠. 첫 게임에는 15분을 남겨 놓고 들어갔고' 어떨 때는 한국에서 손님이 왔는데 끝날 때까지 몸만 풀었죠. 4개월 정도 지났을 때 기회가 오더라고요. 부상 선수가 있어서 나가게 됐는데 잘하니까 베스트가 된 거예요.”

“요한 크루이프랑 경기를 하면서 팔꿈치로 맞은 게 당시에는 이슈가 됐었죠. 크루이프와는 세 번 싸웠는데 너무 잘해요. 제가 크루이프' 마라도나' 베켄바워와 경기를 해봤는데 누가 더 잘한다고 말할 수 없어요. 다 축구 천재였어요.”

일년을 뛴 허정무에게 PSV에서는 장기 계약을 요구했다. 하지만 허정무는 일년 계약을 원했다. 그에게는 향수병이 있었다.

“와이프가 고생을 많이 했죠. 한번은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오셨는데' 날씨도 칙칙하고 한국 사람도 없어 외로우니 웬만하면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1983년 PSV는 대통령배 축구대회에 참가해 우승을 차지했다. 동료들과 함께 온 허정무를 보기 위해 동대문 운동장은 관중들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들뜨지 않았다.

“PSV에서는 2년만 더 뛰면 시민권을 준다고 설득을 했는데 그냥 돌아왔어요. 그전에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이적료가 발생하지 않도록 계약도 했었거든요.”




1986 멕시코 월드컵 이탈리아전에서 만회골을 넣는 모습 ⓒ한국축구100년사



잊지 못할 일본전 결승골' 1986 멕시코 월드컵 뛰며 명예로운 은퇴

국내로 돌아온 허정무는 현대 호랑이(현 울산)의 창단 멤버로 합류하며 한국 프로축구의 시작에 힘을 보탰다. 관중들은 허정무의 뛰는 모습을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았다. 해외파의 귀환은 예나 지금이나 반가운 일이다. 1984년 팬들이 뽑은 인기투표 1위는 허정무였다.

그에게는 마지막 과제가 있었다. 바로 월드컵이다. 국가대표팀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예선을 참가했고 허정무는 마지막 힘을 짜냈다. 그는 무릎 부상이 있었음에도 최종예선에서 최다 득점을 기록했다.

32년만의 월드컵 본선행은 일본전에서 결정됐다. 잠실주경기장에서 2차전이 열렸고' 허정무는 역사적인 골을 기록했다.

“무릎이 아파서 못 후반전에 교체로 들어갔어요. 왼쪽에서 박창선이 크로스를 했고 최순호가 가슴으로 받아서 슈팅을 했는데' 골대에 맞고 나오는 것을 제가 쇄도해서 골을 넣었죠. 최순호가 슈팅을 할 때부터 예측하고 들어갔어요.”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오른 허정무는 “내 임무는 끝났다”라는 소감을 남겼다고 한다. 무릎 부상으로 월드컵 본선 출전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술을 앞둔 그에게 한 사람이 찾아왔고' 부상 부위에 비약을 처방했다. 그것 때문인지' 혹은 휴식 때문인지 무릎 통증은 사라졌고 그는 월드컵에 출전한다.

첫 경기는 당대 최강 아르헨티나였다. 아르헨티나에는 디에고 마라도나가 있었다. 허정무는 이 경기를 잊지 못한다.

“마라도나에 대한 걱정이 많았어요. 문제는 마라도나 한 명이 아니라는 거죠. 아르헨티나 전체가 황금 멤버였거든요.”

“처음에는 제가 마라도나의 마크맨이었어요. 그런데 경기 당일날 김평석으로 바뀌더라고요. 막상 경기에 들어가니까 힘과 스피드로는 막을 수가 없었고' 도중에 저로 바뀐 거예요.”

우리 대표팀은 다소 거친 경기를 펼쳤다. 하지만 결과는 1-3 패배. 한 골을 넣은 것에 만족해야 했다. 두 번째 경기에서는 불가리아와 1-1로 비겼고' 세 번째 경기에서는 이탈리아에 2-3으로 패했다. 허정무는 세 경기에 모두 출전해 이탈리아전에서 만회골을 기록했다.

“월드컵 내내 수비수를 봤어요. 불가리아 전에서는 중앙 수비를 봤고' 이탈리아전에서는 왼쪽 풀백을 봤죠. 지고 있으니까 후반전에 미드필더로 나가면서 골을 넣은 거예요.”

32년만의 월드컵 출전. 국민들은 큰 기대에 부풀었지만 세계의 벽은 높았다. 대표팀은 2무 1패로 귀국했다. 월드컵에서 돌아온 허정무는 묵묵히 K리그를 소화했고' 그 해 12월 30일 은퇴를 선언했다.

“선수 생활은 제 인생의 나침반이었어요. 비록 과거일 뿐이지만 그로 인해 제 미래까지 다 만들어졌으니까요. 정말 열심히 뛰었습니다.”


글=손춘근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 나의 선수시절 코너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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