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용 감독은 화려했던 선수 생활을 뒤로하고 지도자로 새출발했다 ⓒ손춘근
신태용(42)은 대표적인 ‘원클럽맨(One-Club Man)’이다. 1992년 일화(현 성남)에 입단해 2004년 호주로 이적하기까지 오직 한 팀에서만 선수 생활을 했다. 2009년 감독으로 데뷔한 팀도 성남이다. 신태용은 선수와 감독을 통틀어 6번의 K리그 우승' 두 번의 아시아 정상' 그리고 두 번의 FA컵 우승을 성남과 함께 했다.
개인기록도 화려하다. K리그 통산 401경기에 출장해 99골' 68도움을 기록했다. 401경기 출장과 99골은 역대 9위에 해당하는 대기록. 게다가 68도움은 9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으며' 2003년 그가 처음으로 문을 연 60-60클럽(60골' 60도움)은 십 년이 다되도록 두 번째 회원이 나타나지 않았다.
공격형 미드필더' 측면 공격수' 최전방 스트라이커 등 공격 포지션을 두루 소화한 그는 때로는 수비수' 심지어는 골키퍼까지 수행했으며' 언제나 영리한 플레이를 펼쳐 ‘그라운드의 여우’라 불렸다. 비록 국가대표팀에서는 불운했으나 그의 선수 시절은 누구보다 화려했다.
영해초등학교 시절 그는 항상 유니폼을 입고 다녔다 ⓒ신태용 제공
동기를 기합 준 못 말리는 ‘축구 천재’ 경북 영덕군에서 태어난 신태용은 축구부였던 아버지와 형을 따라 7살 때부터 축구를 했다. 3남 3녀의 막내 아들. 워낙 축구를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막내 아들이 축구를 시작하자 없는 살림에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아버지는 조기 축구에서 이름을 날렸고' 6살 터울이던 둘째 형은 축구선수로 활약했다.
“영해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어릴 때부터 공을 잘 찬 것 같아요. 내가 내 또래 친구들을 가르치고 그랬으니까.(웃음)”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정식 축구부원이 되자 그의 어깨에는 날개가 달렸다. 그는 축구를 하지 않을 때도 항상 축구화를 신고 다녔고' 자나깨나 항상 단체복을 입었다. 항상 축구만 생각하던 그는 실력도 출중했다.
“어렸을 때부터 주장을 맡았고' 초등학교 때는 동기들한테 기합도 줬어요.(웃음) 지는 것을 정말 싫어했거든요.”
“초등학교 때는 9명까지 제치고 골을 넣어봤어요. 센터 서클에서 볼을 주고 받으면서 제쳤죠.(웃음)”
중학교에 진학한 신태용은 더 나은 환경에서 축구를 하기 위해 세 번이나 전학을 갔고' 결국 축구 특기자가 아닌 일반 학생 신분으로 대구공고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대구공고에 진학해서도 한 동안은 공부를 해야 했다.
여기에는 그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뀔 뻔한 재미있는 사연이 숨어있다.
“다른 친구들도 대구공고에 오기로 돼 있었어요. 제가 1호로 간 거였죠. 그런데 제가 전학을 가니까 경상북도 교육청에서 타지역으로 전학을 못하게 하면서 포철공고가 창단됐죠. 나머지 애들은 다 포철공고로 갔어요.”
만약 그때 신태용이 포철공고에 갔다면 그는 노란색이 아닌 검붉은색을 대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U-19 청소년 대표팀 시절 동료들과 함께한 신태용 (왼쪽 앉아 있는 선수) ⓒ신태용 제공
U-17 FIFA 월드컵에서의 두 골! 본격적인 엘리트 코스 대구공고의 에이스로 활약하던 신태용은 당시 김삼락 감독의 눈에 띄면서 U-17 청소년 대표팀에 선발됐다. 당시에는 주로 부평고' 동북고' 한양공고 같은 학교에서 대표 선수가 배출됐는데' 대구공고에서 대표 선수가 배출된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당시 U-17 대표팀의 면면은 굉장히 화려했다. 신태용과 서정원(현 수원 감독)을 비롯해 정광석(현 용인시청 감독)' 김병수(현 영남대 감독)' 김봉수(전 올림픽대표팀 코치)' 노정윤' 김인완(현 대전 감독) 등 최고의 선수들이 경기장을 메웠다. 그 중에서도 신태용과 서정원은 눈에 띄는 유망주였다.
“그때는 내가 왼쪽' 서정원 감독이 오른쪽 윙 포워드를 봤죠. 둘이 총알이었어요. 100미터를 뛰면 서정원이 12초 75' 제가 12초 8을 뛰었으니까요. 그때는 스피드도 있고 순간포착도 좋았어요. 그때부터 ‘꾀돌이’라고 했으니까요.”
조별예선에서 두 골을 넣은 신태용의 활약에 힘입어 U-17 대표팀은 8강에 올랐다. 비록 8강에서 이탈리아에 0-2로 패했지만 골대를 두 차례나 맞추는 등 대등한 경기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U-19 청소년 대표팀 소개 책자의 신태용 (서정원 감독, 김도훈 코치 등의 모습도 보인다) ⓒ신태용 제공
신태용은 세계 대회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또래 최고의 선수로 발돋움했다. 월드컵에서 돌아온 그는 대구공고에 창단 첫 우승컵(중고축구선수권대회)을 선사하기도 했다.
그는 곧바로 영남대로 진학했고 계속해서 연령별 대표팀에 선발됐다. 꾸준히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그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팀’에서 승선했다. U-17 대표팀부터 한솥밥을 먹던 선수들이 여전히 주축이었다.
“그때는 거의 매일 합숙이었죠. 대표팀 합숙하다가 대학교에서 시합 있으면 보내주는 식이었죠.”
“휴가 나와서는 대통령배 축구대회에서 우승도 했어요. 영남대의 창단 첫 우승이었죠. 프로 2군까지 나오던 대회였는데 결승전에서 제가 2골 1도움을 기록했어요.”
위기도 있었다. 크라머 감독이 올림픽대표팀에 부임하던 당시 팔에 뼈 이식 수술을 받는 바람에 제 기량을 보여주지 못한 것. 탈락 위기에 몰렸던 신태용은 “훈련이라도 제대로 해보고 나가고 싶다”며 당돌한 요청을 했고' 마산에서 열린 마지막 평가전에서 왼쪽 수비수로 출전해 두 골을 넣어 살아 남았다. 그러나 이 활약 덕분에 그는 공격수가 아닌 왼쪽 수비수로 올림픽을 치러야 했다.
“올림픽에서는 너무나 잘했는데' 한편으로는 너무 아쉬웠죠. 멤버도 좋았고' 경기 내용도 좋았는데… 본선 직전에 크라머 감독님께서 그만 두셨는데' 그러지 않았다면 아마 우리가 기적을 이루지 않았을까요? 아쉽게 3무로 탈락했죠.”
U-19 청소년 대표팀 시절 숙소에서 ⓒ신태용 제공
K리그 신인 돌풍! 일화 3연패의 주역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열린 1992년은 프로에 데뷔하던 해이기도 하다. 신태용은 포항에서 지명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홍명보(전 올림픽대표팀 감독)가 갑자기 드래프트를 신청하자 포항은 신태용 대신 홍명보를 1순위로 지명했다. 신태용은 대우 로얄즈(현 부산)의 지명을 받았지만' 대우는 일화의 김정혁을 데려오기 위해 신태용과 이태홍을 일화에 내줬다. 신태용은 일화 입단을 거부했다.
“박종환 감독님이 너무 무섭다고 소문이 나서 축구화를 벗을 각오로 훈련에 안 들어갔죠. 그러다 마산에 끌려갔는데' 너무 무서워서 축구를 안하고 싶다고 솔직히 말했죠. 그 다음부터는 욕도 안 하시고 잘 챙겨주셨어요.”
신태용은 일화 입단 첫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올림픽을 다녀오느라 후반기밖에 뛰지 못했지만 9골 5도움이나 기록한 것. 일화는 신인 신태용의 활약에 힘입어 정규리그 2위를 차지했다.
“자신감이 붙은 거죠. 그때는 차면 들어갔으니까요. (웃음) 5~6년 선배들도 무섭지 않았어요.”
“그때 (홍)명보 형이 MVP를 받고' 내가 신인상을 받고' 임근재가 득점상을 받았어요. 우리가 포항에 지는 바람에 준우승을 했는데' 그때는 제가 잘 했거든요. 올림픽 갔다 와서 판세를 엎었으니까요.”
1996년 AC밀란과의 친선경기에 출전한 신태용(7번) ⓒ홍석균
창단 3년 만에 준우승을 차지한 일화는 1993년 마침내 첫 우승을 일궈냈다. 신태용은 2년차 징크스도 없이 6골 7도움을 만들며 팀의 창단 첫 우승을 도왔다. 성남은 이듬해에도 우승을 차지해 2연패를 달성했고' 신태용은 8골 4도움의 기복 없는 활약을 펼쳤다.
“92년' 93년이 제일 잘 했던 것 같아요. 93년하고 94년에는 내가 MVP를 받았어야 되는데' 선배들에게 밀려서 MVP를 못 탔죠. 92년부터 96년까지가 최고 전성기였어요. 95년에 MVP를 받고' 96년에 득점상을 받았으니까요.”
일화가 3연패를 할 당시 신태용은 전력의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MVP는 이상윤(MBC SPORTS 해설위원)과 고정운(전 성남 코치)에게 차례로 돌아갔다. 신태용이 1995년에 MVP를 차지하자 ‘삼수 끝에 MVP’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당시에는 MVP를 한 명한테 밀어주기도 했어요. 93년도에는 창단 첫 우승이니까 선배들에게 MVP가 돌아갔죠. 제가 MVP를 받은 95년은 사리체프(신의손' 현 부산 코치)가 받았어야 되죠. 이방인이어서 못 받은 건데' 사리체프한테 미안했죠.”
이듬해인 1996년에는 K리그에서 21골이나 넣으며 득점왕에 오르기도 했다. 두 경기 연속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절정의 골 감각을 뽐낸 것이 이 시즌이었다.
“그때는 스트라이커 였거든요. 일화 입단 후 계속 게임메이커를 보다가 외국인 미드필더가 들어오면서 제가 스트라이커로 올라간거죠.”
“제일 기억 남은 경기는 96년도 챔피언결정전 2차전이에요. 포항에 0-2로 지다가 3-2로 역전시켰고 3-3으로 끝나는데' 제가 2골 1도움을 했어요. 후반전만 들어가서요.”
“그때 허리를 다쳐서 1차전도 못 뛰고 2차전도 그냥 따라 갔는데' 전반전을 0-2로 진 거에요. 박종환 감독님이 ‘뛰어볼래?’ 그러시는데' 그때가 아니면 MVP를 못 받을 거 같은 거에요. 그래서 들어갔는데' 제가 세 골을 만들어서 3-2로 역전한 거에요. 당시에는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히트를 쳤죠.”
1999년 FA컵 우승 세리머니 ⓒ홍석균
최고 선수로 우뚝 섰지만 유독 인연이 없었던 국가대표팀 90년대 중반' K리그 최고의 스타는 단연 신태용이었다. ‘그라운드의 여우’라 불리며 일화의 3연패를 주도했고' 1996년에는 득점왕까지 차지했다. 하지만 유독 국가대표팀과는 인연이 없었다.
‘1994 미국 월드컵’을 앞두고는 바로 직전에 대표팀에서 탈락했고' 김호 감독의 바통을 이어받은 차범근 감독에게도 신임을 받지 못했다. 그는 K리그 최고 선수임에도 월드컵 무대는 밟지 못했다. 대표팀에서 탈락하는 순간마다 좌절이 왔지만 신태용은 특유의 밝은 성격으로 슬럼프를 피해갔다.
“지금도 후회가 되는 건 대표팀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축구를 안 한 거에요. 당시 내로라하는 선배들을 서포트하려고만 했는데' 그게 후회돼요. 내가 중심이라고 생각했어야 됐는데' 그렇게 못 했어요. 내가 가질 걸 50%도 보여주지 못했죠.”
1999년 부산을 상대로 경기하는 신태용 ⓒ홍석균
부진을 딛고 일어서 더욱 특별한 두 번째 MVP 신태용은 1997년 발목 연골에 문제가 생겨 부진에 빠졌다. K리그 3연패' MVP' 득점왕까지 차지한 후라 동기부여도 부족했다. 변화가 필요한 시기였고' 해외 진출을 타진했다.
“독일의 한자 로스토크에 간다고 보도가 됐어요. 확정적이었죠. 그런데 이적료에서 이견이 있었고' 결국 무산됐죠. 당시에 나갔으면 더 성장하지 않았을까요?”
신태용과 일화는 동반 부진했다. 일화는 1998년 최하위로 떨어지기도 했다. 한번 떨어진 성적을 다시 끌어올리는 데는 4년이나 걸렸다. 신태용은 1997년과 1998년의 부진을 털어내고 매년 고군분투했지만 올라가는 속도는 떨어지는 속도보다 느렸다.
“선수들이 하고자 하는 의욕이 없었던 거죠. 그리고 팀이 어딘가 모르게 하나가 안 됐어요. 뭔가 안 맞았죠.”
2001년 두 번째 MVP를 수상한 신태용 ⓒ홍석균
신태용의 플레이 스타일은 서서히 변했다. 전성기 시절 직접 골을 넣었다면' 90년대 후반에는 패스를 통해 경기를 풀어갔다. 이 즈음 도움의 숫자가 현저히 늘어난 것도 그 때문이다.
“미드필더를 보니까 골을 넣는 것보다 도움이 더 재미있게 느꼈어요. 아쉬운 건 도움왕을 못하고 은퇴한 거에요. 베스트일레븐도 9번이나 받고 득점상도 받아봤는데' 도움왕만 못했죠.”
일화는 2000년 성남으로 연고지를 옮기면서 새롭게 출발했다. 정규리그에서도 2위를 차지하는 등 성적에도 변화가 왔다. 그리고 2001년 주장 신태용은 성남에 또 다시 우승컵을 안겼다. 신태용은 두 번째 MVP를 수상했다.
“주장을 하면서 전반적으로 팀을 이끌어 갔죠. 고생도 많이 했어요. 팀이 하나가 되도록 많이 노력했고' 훈련이 끝나면 고참 위주로 회식도 자주 했어요.”
“1995년에는 첫 MVP를 받으니까 나름대로 맛이 있었고' 2001년에는 신태용이 잊혀질만 할 때 MVP를 받으니까 주위 사람들이 돌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죠.”
신태용은 2001년 10개의 도움을 기록했고' 2002년과 2003년에는 각각 7개' 그리고 2004년에는 4개의 도움을 올리며 시즌을 마쳤다. K리그 통산 68개의 도움으로 단연 최고의 기록. 또한 2003년에는 사상 최초로 60-60클럽에 가입하며 살아있는 기록의 사나이로 인식됐다.
“팬들에게 100호 골은 진짜 멋있게 필드 골로 넣겠다고 약속했어요. PK는 안 차겠다고요. 그런 다음에 PK가 세 번인가 왔는데' 다 양보했죠. 그리고 시즌이 끝나버려서 100골을 못 넣고 은퇴했어요.”
“제 기록에 대한 자부심은 항상 있죠. 코너킥으로 골도 넣어봤고' 골키퍼로 뛰면서 두 골 먹고 3-2로 이긴 적도 있어요.(웃음)”
2000년 K리그 시상식에서 ⓒ홍석균
갑작스런 호주 이적' 한 경기 뛰고 은퇴 선언2004년까지 성남에서 뛴 신태용은 계약 연장을 하지 못하고 2005년 호주 A리그로 이적했다. 그러나 퀸즈랜드 로어FC의 유니폼을 입은 그는 동기부여가 되지 못했고' 체력의 한계를 느끼며 단 한 경기만 소화하고 은퇴를 결심했다.
“항상 성실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나의 목표였죠. 선수 시절에 항상 운이 좋았어요. 천운을 타고 났다고 생각하죠. 제가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는데 고등학교' 대학교' 일화에서도 항상 창단 첫 우승을 다 시켰어요.”
“축구를 하면서 복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감독을 하면서도 우승' 준우승도 다 해봤으니까요.”
2009년 성남의 감독을 맡아 지도자로 성공시대를 썼던 신태용은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 있다. 마냥 쉬는 것이 아니다. 스페인' 독일' 잉글랜드를 돌며 선진 축구를 배워올 예정이다. 그는 내일을 준비하고 있다.
“성남 색깔을 벗고 다른 준비를 할 시간이에요. 마지막 꿈은 빨간 색 유니폼이죠. 스스로 역량을 만들어 놓고 기다려야죠. 그때는 내가 가진 모든 축구를 총동원해서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할 생각입니다.”
글=손춘근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13년 3월호 '나의 선수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