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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선수 시절 69] 윤상철' 정통 스트라이커의 교본

2013-02-15 00:00:00 7,236

선수 시절을 회상하며 미소를 보이는 윤상철 감독 ⓒ안기희



현대 축구는 ‘멀티 플레이’가 대세다. 공격수가 수비까지' 수비수가 공격까지 커버하도록 요구한다.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선수가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팀 플레이가 한층 더 탄탄해진다는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정통 스트라이커의 계보가 쉽게 이어지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스트라이커 본연의 역할인 ‘득점’에 집중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윤상철(48' 경신고 교사)은 바로 ‘득점 본능’에 충실했던 선수였다. 그는 1980년대와 90년대 국내 스트라이커 계보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프로축구 개인통산 첫 100골 300경기 달성의 주인공. 득점왕(1990년' 1994년)' 도움왕(1993년) 등 화려한 기록들이 아직도 그의 이름을 수놓고 있다. 그야말로 결정력이 빛났던 ‘고감도 스트라이커’였다.

정통 스트라이커를 꿈꾸는 선수들의 교본이 되고 있는 윤상철의 선수 시절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리고 미래의 스트라이커 양성에 대해 던진 뼈있는 한마디까지. 가 모두 담았다.




1988년 프로에 진출한 윤상철은 은퇴할때까지 안양LG에서만 뛰었다 ⓒKFA 홍석균



운동을 좋아했던 소년

윤상철은 10살 때 축구를 시작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저 좋아서다. 오로지 축구만 한 건 아니었다. 그는 모든 운동들을 즐겼고' 그 중에서도 축구를 제일 사랑했다.

“옛날에는 놀만한 게 없잖아요. 뛰어 노는 게 전부였죠. 이 때문인지 여러 종목의 운동은 다 잘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중에서 축구가 제일 좋았어요. 푹 빠졌죠. 집에서 반대했는데 숨어서 할 정도였으니까요.”

숭곡초 시절부터 축구에 두각을 보인 윤상철은 축구 명문인 경신중과 경신고를 거쳤다. 이 당시에도 그는 뛰어난 축구 실력을 보였지만' 실력에 비해 성격은 온순했다.

“옛날에는 선생님들이 워낙 불 같아서 기합' 체벌이 심했잖아요. 그런데 저는 제가 뭘 잘못해서 혼나 본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튀지 않는 성격 때문에 모범적으로 학교 생활을 했던 편이죠. 그래서 저로 인해 팀 동료들이 피해를 본 건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건국대의 부흥' 그 시작은 윤상철

선수 윤상철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건 건국대 시절이었다. 건국대는 이전에도 김재한' 김진국 등 대스타들을 간간히 배출했지만 그에 걸맞는 성적을 내지 못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윤상철이 입학한 1980년대 중반부터 각종 대회 우승을 휩쓰는 등 돌풍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제 앞 세대는 조금 약했죠. 그런데 제 밑으로 선수들이 정말 좋았어요. 건국대가 축구 명문이 된 건 그때부터가 아닌가 싶네요.”

“그 때 제 후배로 있었던 선수들이 고정운' 이상윤' 황선홍 등이었어요. 이 선수들과 한 방을 썼죠. 당시 우리 학교는 네 명이 한 방을 사용했어요. 그야말로 우리 방은 ‘대표팀 방’이었던 셈이죠. 서울 캠퍼스에 있었던 그 숙소가 지금은 없어져서 아쉽네요.”

윤상철이 3학년이었던 1986년은 건국대의 전성기였다. 춘계' 추계 연맹전에서 우승하며 2관왕을 달성한 것이다. 물론 윤상철은 그 때도 팀 우승의 주역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87년' 윤상철은 무릎 부상으로 선수 생활의 위기를 맞이했다.

“대통령배 축구대회 첫 경기 나갔다가 무릎을 다쳤어요. 그런데 사실 3학년 때 한 번 파열됐고 그게 누적이 되다 보니 부상이 더 커진 셈이죠. 무릎이 안 좋은 상태에서 경기를 나가니 스스로 다쳤어요. 7월에 수술하고 마지막 경기에 몇 분 뛰었죠. 대학 4학년 때는 단 두 경기 뛰었습니다.”




1997년 프로통산 100골을 달성한 윤상철 ⓒKFA 홍석균



드래프트 1순위로 럭키 금성 입단

무릎 부상 탓에 경기를 거의 뛰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윤상철은 1988년 프로축구 드래프트 1순위로 럭키 금성에 입단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당시 럭키 금성에 구승회 단장이라고 계셨어요. 그 분이 저를 대학 3학년 때까지 유심히 봤다고 하더라고요. 절 좋아하셨어요. 사실 자유계약으로 절 데려가려는 팀들이 정말 많았거든요. 그런데 제가 프로에 들어가던 해에 드래프트가 처음으로 시행됐고 그 때 럭키 금성 유니폼을 입게 됐습니다.”

“운동을 못해 몸무게가 15kg 정도 불어 있었죠. 그래서 겨울 내내 체중을 감량하는데 집중했어요. 무릎 후유증 때문에 그 해 동계 훈련은 거의 못했거든요. 당시 고재욱 감독님께서 개막전 때 저를 내보내셨는데 잠깐 뛰었는데도 몸이 안되더라고요. 한 두 달 정도 몸을 만들어서 5월 대우하고 홈경기 때 후반 교체 멤버로 들어갔는데 결승골을 넣었습니다.”

정상 컨디션으로 올리기까지는 인고의 시간이었다. 윤상철은 자신과의 싸움' 그리고 쟁쟁한 멤버들이 가득했던 팀 내에서의 경쟁까지 피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였다.

“개막전 끝나고 힘들었어요. 그래서 남들 모르게 새벽이고 밤이고 가리지 않고 진짜 운동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신인이 처음 프로팀에 들어갔을 때 수많은 경쟁에 부딪히게 되는데 부상도 있고 동계 훈련도 안 했던 저는 정말 힘들 수밖에 없었죠. 게다가 당시 럭키 금성은 제 포지션이 다 대표 선수였어요. 경쟁해서 그 자리에 들어가려면 보통 일이 아니었죠.”

기록의 사나이' 그 위대한 탄생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윤상철은 프로 데뷔 첫 해 4골을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였다. 물론 쉽게 얻은 수확은 아니었다. 축구를 포기할 뻔하는 등 위기가 뒤따랐다.

“데뷔 첫 해 전반기 끝나고 축구를 포기하려 했어요. 너무 힘들고 미래가 불투명해서였죠. 후반기 들어가기 전 합숙 훈련이 있었는데 당시 조영증 코치님께 너무 힘드니 한 달만 나를 찾지 말라고 했어요. 코치님과 실랑이 많이 했었죠.(웃음)”

“결국 합숙 훈련에 내려는 갔어요. 한 1주일 동안은 운동을 하지 않았죠. 산에 가서 혼자 생각을 정리하곤 했어요. 그러다가 결심했죠. 후반기까지만 더 뛰어보고 결정하자고요. 다행히 후반기 때는 몸 상태가 더 좋아졌어요. 조금만 더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위기를 무사히 넘긴 윤상철은 프로 2년 차인 1989년 17골로 득점 2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프로 3년 차인 1990년에는 12골로 첫 득점왕을 차지하는 기쁨을 맛봤다. 기록의 사나이' 정통 스트라이커의 탄생은 이렇게 짜릿했다.

“힘들었던 시절이 약이 됐어요. 잘 이겨냈기에 프로 생활 동안 좋은 기록을 낼 수 있었죠.”

한 시즌 최다골' 절치부심의 결과

1990년대 초중반은 선수 윤상철의 최고 전성기였다. 특히 1993년과 94년이 그랬다. 그는 1993년 8개로 도움왕을 차지했다. 또 8월 25일 동대문에서 열린 하이트배 코리아리그 유공전에서 생애 최초의 프로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했다. 1994년에는 두 번째' 세 번째 해트트릭과 더불어 24골로 한 시즌 최다골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절정의 골 감각은 개인의 능력이 탁월했던 덕분이기도 했지만 동료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면도 있었다.

“우리 팀에는 특징 있는 선수들이 골고루 잘 배치됐어요. 역할 분담이 잘 되어있던 셈이죠. 저는 스트라이커였지만 다른 포지션의 선수들과 모두 호흡이 잘 맞았는데 이유가 뭔지 아세요? 그 당시 축구는 전술적으로 많이 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죠. 저는 골대 앞에서 골만 넣어주면 되는 거고 미드필더는 제게 양질의 패스만 주면 됐었어요.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기에 가능했죠.”

“1994년은 사연이 길어요. 조영증 감독 부임 이후로 제 입지가 좋지 못했죠. 있는 선수들을 내보내고 세대 교체를 하더라고요. 그 당시 전 주장이었는데 개막전을 뛰고 그 뒤로 열 경기 이상을 뛰지 못했어요. 참 힘든 시기였죠. 그런데 어린 선수들만 데리고 하니 팀이 그만 연패에 빠진 거에요. 결국 제가 열 몇 경기만에 투입됐는데 투입된 그 경기에서 2골 1도움을 기록했어요. 이제는 벤치에 앉힐 이유가 없었죠. 그 뒤로 계속 골을 넣었더니 결국 최다골이 됐습니다.(웃음)”




골을 넣는 것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프로페셔널이었다 ⓒKFA 홍석균



스트라이커 계보' 꾸준히 이어져야

윤상철은 프로 개인 통산 최초로 300경기 출장을 달성하고 1997년에 은퇴했다. 101골 31도움. 2013년인 현재까지도 그는 이동국' 우성용' 김도훈 등과 함께 역대 득점 랭킹 10위권 내(8위)에 있다. 프로축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셈이다. 하지만 그는 뿌듯함보다는 걱정이 더 컸다. 자신의 뒤를 이을 제대로 된 스트라이커가 나오지 않고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제가 아직까지 역대 득점 랭킹 10권 내에 있는데 사실 앞으로 이 자리를 대신할 선수가 나오기는 쉽지 않을 거에요. 국내 스트라이커를 양성해야 할 이유죠. 이동국 이후로 국내 리그에서 제대로 된 정통 스트라이커가 나오지 않고 있어요. 스트라이커는 키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나라는 스트라이커 부족이에요. 너무 많은 미드필드 플레이를 요구하기 때문이죠. 그러다 보니 정작 문전에서 집중력을 발휘하지 못해요. 선수들이 각자 위치에서 남들과 차별화된 기술로 제 기량을 보여줘야 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아요.

자신의 모든 걸 바친 프로축구에 대해 의미 있는 한 마디도 남겼다.

“올해가 30주년이라는데' 사실 30년 전부턴 지금을 준비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시스템이나 인프라 말이죠. 이제부터라도 또 다시 30년 후를 내다보며 달려야 합니다. 핵심은 유소년이에요. 스트라이커 육성은 유소년 때부터 하는 게 중요합니다.”


글=안기희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13년 2월호 '나의 선수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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