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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선수 시절 68] 홍명보' 설명이 필요 없는 ‘영원한 리베로’

2013-01-21 00:00:00 11,675

선수 시절을 이야기하며 미소를 띄는 홍명보 감독 ⓒKFA 홍석균



A매치 136경기' 4번의 월드컵' 그리고 FIFA에서 선정한 ‘세계 100대 축구 선수’. 홍명보 감독(43' 전 올림픽대표팀)의 선수 시절은 누구보다 반짝인다.

11살에 축구에 입문한 홍명보 감독은 선수 생활 24년간 항상 최고의 길을 걸어갔다. 대학생 신분으로 ‘1990 이탈리아 월드컵’ 풀타임 출전' 프로 입문 첫 해 MVP 수상' ‘1994 미국 월드컵’에서 통쾌한 두 골' J리그 최초의 외국인 주장' ‘2002 한일 월드컵’ 브론즈슈 수상' A매치 최다 출전 신기록 등 그가 지나온 길은 역사에 남았다. 한국 축구 최고의 보물인 그의 선수 시절을 짧게 소개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이제는 지도자로 더 유명한 홍명보 감독은 자신의 선수 생활을 “행복한 시간이었다”라고 회고한다.




1999년 홍명보의 센추리클럽 가입을 축하하는 정몽준 명예회장과 조중연 회장 ⓒKFA 홍석균



어렵게 시작한 축구' 작은 체구로 불안했던 학창 시절

역사의 시작은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 서울 광장초등학교 4학년의 홍명보. 꼬마 홍명보는 항상 친구들과 어울려 축구를 즐겼지만' 학교에 축구부가 생기자 그럴 수 없었다. 축구부에 가입한 친구들과 달리' 부모님의 반대로 축구부에 가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홍명보는 1년간 축구부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부모님께서 ‘아들이 혼자니까 힘든 운동 보다는 공부를 하는 게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축구를 정말 좋아하니까 부모님도 안쓰러운 마음이 있었겠죠. 그때 코치 선생님께서 적극적으로 이야기해 주시고' 저도 축구를 하고 싶다고 해서 승낙을 받았죠.”

“그때는 축구부에 축구공이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좋은 공을 차지하기 위해서 새벽에 일찍 가서 수업 들어가기 전까지 연습을 했던 게 기억이 나요.(웃음)”

축구는 늦게 시작했지만 실력은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작은 체구는 고민거리였다. 체구가 작다 보니 체력도 떨어져 친구들과는 다른 훈련을 해야 했다.

“중학교 때 문제점이 나타나기 시작했죠. 체력적으로 너무 약하고' 체격적으로 너무 왜소하다 보니까 기술이 좋아도 잘 발휘가 안 된 것 같아요.”

“매일 매일 고통스러운 날들이었어요. 어느 날 갑자기 코치 선생님이 ‘너는 체력이 약해서 운동을 그만 해야 되겠다’라는 말을 하실 까봐 굉장히 두려웠어요.”

“체력 훈련을 하면 다음 훈련에 지장이 생기다 보니까 기본기 훈련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던 것 같아요. 패스' 트래핑' 볼 컨트롤 같은 데 시간을 많이 썼어요.”

이때 갈고 닦은 기본기는 훗날 그의 큰 자산이 됐다.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1990년 다이너스티컵에서 우승한 후(가장 오른쪽이 홍명보)



운명의 ‘리베로’' 그리고 ‘1990 이탈리아 월드컵’

홍명보 감독이 가장 좋아하는 별명은 ‘영원한 리베로’라고 한다. 하지만 학창시절에는 리베로가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는 측면 공격수' 중학교부터 대학교 때까지는 미드필더였다. 처음으로 리베로가 된 것은 대학 3학년 때였다.

“패싱이 좋아서 중학교 때부터 미드필더를 봤어요. 하지만 체력이 약해 반 게임 정도만 뛰었죠.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도 신체 조건이 좋지 않았죠.”

“대학교 때는 수비형 미드필더를 맡았는데' 약간 수비적인 역할을 했어요. 대학교 3학년 때 리베로로 바꾸면서 조금 더 자유롭게 경기할 수 있었던 거죠. 미드필더나 어렸을 때 봤던 공격수의 기술이 잘 발휘가 된 것 같아요. 공격 나가서 골도 많이 넣었고요.”

리베로로 바꾸면서 대학 무대를 평정한 홍명보는 국가대표팀까지 오르는 파격적인 행운을 얻는다. 당시 대표팀 코치였던 허정무 감독이 고려대를 찾아 홍명보를 지켜봤고' 대표팀 사령탑 이회택 감독은 홍명보를 선발해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까지 데려갔다.

“처음에는 잘해서 들어갔다기 보다는 이 선수가 어떤 능력이 있는지 보시려고 부르신 것 같아요. 그런데 처음부터 경기에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제 포지션의 선수가 전부 부상이었어요.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저 밖에 없었죠.”

“월드컵에 뽑힐 지도 몰랐고' 월드컵에서 경기를 뛸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이탈리아에 가 있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행복했거든요. 그런데 선배들이 전혀 회복되지 않았고' 경기 하루 전에 출전하는 쪽으로 바뀌었어요.”

22세의 막내 홍명보는 스위퍼라는 중책을 짊어지고 월드컵에 출전했다. 포지션상 선배들에게 지시를 내려야 했지만 홍명보는 생각보다 좋은 경기력을 펼쳤다. 비록 3패로 대회를 마쳤지만' 홍명보는 자신감을 안고 돌아왔다.

“솔직히 상대가 그렇게 뛰어나다는 생각은 못했어요. 물론 상대가 잘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앞으로 못 넘을 정도는 아니지 않을까’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1992년 데뷔하자마자 K-리그 MVP를 차지한 홍명보 ⓒ월간축구



홍명보는 신인상을 받은 적이 없다?

월드컵에서 돌아온 홍명보는 이듬해 K리그로 진출했다. 최고의 신인이었고 인기도 많았다. 유공(현 제주 유나이티드)에 지명을 받았지만 곧바로 포항으로 트레이드 됐다.

“기대를 많이 받았죠. 포항 선수 세 명하고 트레이드가 돼서 유공에서 포항으로 갔어요. 하지만 수비수기 때문에 나름대로 스트레스가 있었죠. 세 명하고 바꾼 것에 대해 책임감도 있었고' 수비수다 보니까 결정적으로 이기는 데 기여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현재와 과거를 비교하면 역시 현재가 강하죠. 하지만 당시에도 K리그는 나름대로 최고였고' 최고의 선수들이 오는 곳이었어요. 지금과 비교해도 전혀 떨어지지 않았죠.”

홍명보는 입단 첫 해 포항에 우승컵을 안겼다. 그리고 신인상이 아닌 MVP를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신인이 MVP를 수상한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94 미국월드컵 독일전에서의 홍명보 ⓒ한국축구100년사



‘1994 미국 월드컵’' 국민 주장의 탄생

K리그를 통해 꾸준한 경기력을 유지해온 그는 어려움 없이 ‘1994 미국 월드컵’에 참가한다. 당시 김호 감독이 이끌던 국가대표팀은 철저한 준비를 마치고 미국으로 날아갔다. 결과는 2무 1패였지만 경기 내용은 가장 희망적이었다. 홍명보는 미국 월드컵을 통해 대대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

“컨디션이 굉장히 좋았어요. 90년 월드컵을 경험했고' 나름대로 준비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감이 있는 대회였죠.”

“결과가 아쉽기는 했죠. 첫 게임(스페인전)에서는 상대가 한 명 퇴장 당했는데' 두 골을 먹고 나중에 두 골을 추격했어요. 두 번째(볼리비아전) 경기는 이겼으면 16강에 진출할 수 있었는데 비겼고' 독일(3차전)하고 할 때는 상대에게 제압 당해서 초반에 실점을 했어요.”

홍명보는 이 대회에서 두 골을 넣었다. 특히 독일과의 경기에서 터트린 통쾌한 중거리 슈팅은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그의 존재를 알리는 계기였다. 주장 완장을 차고 보여준 골 세리머니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독일전은) 저희가 지고 있는 거니까 벤치에서 더 적극적으로 공격하라고 했어요. 공이 제 앞에 떨어져서 앞에 있던 마테우스 선수를 제치고 오른발 슈팅을 때렸죠. 당시 저는 슈팅이 굉장히 좋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90년 월드컵에 비하면 준비를 잘 했죠. 준비 기간도 그렇고… 지금 생각하면 많이 부족하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최선의 선택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1996년 AC밀란과의 친선경기에서 로베르토 바조를 마크하는 홍명보 ⓒKFA 홍석균



전환점이 필요해

’94 미국 월드컵’을 마치며 승승장구하던 홍명보에게 ‘1996 UAE 아시안컵’은 뼈아픈 기억이다. 대표팀은 대회 내내 부진한 경기를 펼쳤고 급기야 이란과의 8강전에서는 2-6이라는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했다.

“핑계를 찾을 수 없는 완패였죠. 저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한국 축구에도 큰 충격이었어요.”

“제 인생에 동기부여가 필요했죠. K리그에서 MVP도 타고' 매년 베스트 일레븐이었으니까 확실한 목표가 없었어요. 제 자신을 일으켜 세워줄 동기부여가 필요했는데' 당시에는 무조건 해외진출이었죠.”

유럽으로 진출할 기회도 몇 차례 있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는 결국 일본 J리그의 벨마레 히라츠카(현 쇼난 벨마레)로 이적했다.

“’94 미국 월드컵’이 끝나고 일본 J리그가 시작됐을 때는 굉장히 큰 제안이 있었어요. 그때는 팬들이 반대해서 못 갔죠. 그런데 97년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나이도 있고' 팀에 기여도 했기 때문에 좋게 보내주셨어요.”

“새롭게 시작한다는 느낌은 괜찮았어요. 외국인 선수와의 의사소통' 문화 문제 등이 쉽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매일 긴장하는 점은 좋았던 것 같아요.”




벨마레 히라츠카 시절(1997년)의 홍명보



그는 새로운 환경을 경험하며 ‘1998 프랑스 월드컵’에도 출전했다. 그는 당시를 “해외파로서 아웃사이더 같은 느낌”이었다고 말한다.

“당시에 저는 해외파였기 때문에 기존에 있던 선수들과 모든 것을 함께 할 수는 없었죠. 리그 뛰다가 시합 며칠 전에 와서 경기하는 상황이었어요. 94년보다는 조금 아웃사이더 같은 느낌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죠.”

“멕시코전(1-3패)은 충분히 해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먼저 선제골 넣고 퇴장당하고 실점을 했어요. 처음에는 못 느꼈지만 그때 ‘아.. 월드컵이라는 세계 축구의 벽이 있기는 있구나’라는 걸 느꼈어요.”

월드컵을 다녀온 그는 이듬해 가시와 레이솔로 이적한다. 제2의 전성기를 보낸 가시와 레이솔에서 홍명보는 J리그 사상 최초로 외국인 주장이 됐다. 일본인들도 홍명보의 리더십과 인품을 본받기 시작했다.

“선수 시절의 가시와요? 이 시절이 축구에 대해서도 가장 많이 알았던 시기인 것 같아요.”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KFA 홍석균



2002년의 잠 못 이루던 밤

홍명보에게 ‘2002 한일 월드컵’은 절대 빠질 수 없는 이야기다. 8강전에서 승부차기를 승리로 이끈 후 보여준 환한 웃음. 그의 표정에서 대한민국 전 국민은 행복을 느꼈다.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둔 우리 대표팀은 2001년 세계적인 명장 거스 히딩크(현 안지) 감독을 영입했다. 히딩크 감독은 국가대표팀을 전격 개편했고' 그 사이에서 ‘홍명보 길들이기’라는 소문도 들리기 시작했다.

“그 분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한번 뽑히지 않았어요. 그런데 제가 피로 골절로 뽑히지 않은 거였는데 그런 말이 나왔죠. 당시에 저는 뽑혀도 올 수 없는 상황이었죠.”

히딩크 감독은 체력을 극대화한 전술로 대한민국의 4강 신화를 이끌었다. 당시 선수들의 얼굴은 모두가 검게 그을렸다. 힘겨운 훈련의 증거였다.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힘들었죠. 하지만 그때는 제 자신을 충분히 컨트롤 할 수 있는 나이였죠. 나이가 있었기 때문에 체력에 부담은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체력이 다른 선수들에 비해 떨어지지는 않았어요.”




2002월드컵 8강전에서 마지막 페널티킥 순간 ⓒKFA 홍석균



부산에서 열린 폴란드와의 첫 경기. 대표팀은 2-0으로 승리하며 월드컵 사상 첫 승리를 기록했다. 홍명보 감독은 이 경기를 가장 기억나는 경기로 꼽기도 했다.

“월드컵을 세 번이나 나가서 1승도 못했어요. 월드컵에서 잘 못 됐을 때 어떻게 되는지 알기 때문에 대회 전에 굉장히 압박을 많이 받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첫 경기를 이긴 것은 아주 기쁜 일이었죠.”

또한 스페인과 상대한 8강전에서의 피 말리는 승부차기도 잊지 못할 순간이다. 홍명보는 다섯 번째 키커로 나와 5-4 승리의 주인공이 됐다.

“킥하러 들어갈 때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하지만 내 앞에 있는 선수(호아킨)가 못 넣기 전까지는 굉장히 두려웠어요.(웃음) 긴장도 많이 되고…”




2002 월드컵은 홍명보의 웃음을 자주 본 대회였다 ⓒKFA 홍석균



2004년 미국에서 웃으면서 은퇴

‘2002 한일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마친 홍명보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선수 생활 은퇴는 아니었다. 그는 마지막 도전을 위해 미국(LA 갤럭시)으로 건너갔다.

“제 인생에서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외국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때마침 미국에서 제안이 온 거죠.”

“많은 문화의 차이를 느꼈죠. 하지만 삶은 굉장히 좋았어요. 더 성숙해질 수 있었고' 많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죠.”

LA 갤럭시에서 2년간 선수 생활을 이어간 홍명보는 2004년 11월 은퇴를 발표했다. 24년간의 선수 생활을 모두 정리하게 된 그는 웃으면서 축구화를 벗었다.

“시원했어요. 1년 더 할 수 있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 만약 과거로 돌아가서 딱 한 경기만 다시 할 수 있다면' 어떤 경기를 해보고 싶나?

“93년도 카타르 도하에서 일본에 0-1로 진 경기. 그 경기가 제 축구 인생에서 일본에 진 유일한 경기에요.”




후배들의 축하를 받으며 은퇴하는 홍명보 ⓒKFA 홍석균




이제는 감독으로 성공시대를 열고 있는 홍명보 ⓒKFA 홍석균



글=손춘근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13년 1월호 '나의 선수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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