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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선수 시절 59] 노상래' 전남의 전설이자 K리그 대표했던 캐넌 슈터

2012-04-18 00:00:00 6,402

캐넌슈터로 명성을 떨쳤던 노상래 ⓒ이상헌



축구 선수 노상래(42)를 대표하는 말은 '캐넌 슈터'일 것이다.
전남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노상래는 위치를 가리지 않는 대포알 슈팅으로 90년대 중후반 K리그를 수놓았다. 1995년 전남의 창단 멤버로 K리그에 데뷔' 2004년 은퇴할 때까지 76골-40도움을 기록해 '40-40 클럽'을 달성하는 등 K리그 최고의 공격수 중 하나로 평가 받고 있다. 또한 대표팀에서는 A매치 25경기에 출장해 6골을 터뜨리기도 했다. '전남의 전설'이자 'K리그 최고의 캐넌 슈터'로 손꼽히는 노상래의 축구 인생을 들어보자.

반대항 축구를 계기로 축구 시작' 어릴 때부터 타고났던 킥력

노상래가 축구를 시작한 것은 전주동초 4학년 때였다. 반대항 축구대회에 나갔던 그는 모든 골을 혼자 기록하며 축구부 선수들이 포진되어 있던 다른 반들을 제치고 우승을 이끌었다. 당연히 축구부에서는 노상래를 영입하기 위해 나섰다.

'축구부 아이가 5명 있는 반도 우리가 이겼어요. 반대항 축구대회를 치르면서 우리 반이 기록한 11골을 모두 제가 넣었죠.(웃음) 그 이후로 축구부 감독님께서 축구 한번 해보자고 계속 권유하셨어요. 제가 1남 3녀의 외동 아들이라 어머니는 절대 반대하셨는데' 아버지는 약간 시키고 싶으신 마음도 있으셨죠.'

결국 전주동초 축구부에 가입한 노상래는 그 시절부터 킥이 좋기로 유명했다. 한 마디로 슈팅 파워가 대단했다. 군산제일중과 군산제일고를 거치면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확실한 장점을 갖고 있었기에 '노상래하면 슈팅'으로 명성을 떨쳤다.

'어렸을 때부터 킥도 멀리 나가고 슈팅 강도도 셌어요. 물론 그 때는 슈팅의 정확성이나 타이밍 등은 많이 부족했죠. 사실 중고 시절에 크게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지만' 등지면서 하는 스크린 플레이나 슈팅 등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특별한 장점을 가졌기에 노상래는 U-16 대표팀에 선발되어 카타르에서 열린 AFC U-16 챔피언십에 참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간에 발가락 골절 부상을 당했고' 불운하게도 그 이후로는 성인이 될 때까지 각급 연령별 대표팀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고1 때 전국대회 4강에 들면서 눈에 띄어서 대표팀에 뽑혀서 경기에도 나가서 잘했었어요. 당시 노정윤' 신태용' 김인완 등의 친구들이 있었죠. 그런데 경기 도중에 두 번째 발가락에 금이 갔고' 참아보려고 해도 도저히 안되겠더라고요. 감독님이 뛸 수 있겠냐고 했는데' 못 뛸 것 같다고 했죠. 그 이후부터는 대표팀과 인연이 없었습니다.'




전남의 상징이었던 노상래 ⓒKFA 홍석균



꾸준한 반복훈련으로 슈팅 머신의 경지 올라

타고난 킥력을 갖고 있었던 것도 있지만' 노상래가 '캐넌 슈터'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다. 중고교나 대학 시절에 그는 쉴 새 없이 슈팅 훈련을 했다. 그리고 골키퍼들과의 훈련 역시 그에게 슈팅 타이밍이나 골 감각을 익히는데 큰 도움을 줬다.

'학교 운동장에는 골대가 그려진 시멘트 벽이 있잖아요. 골대 안도 구역이 나눠져서 번호가 적혀있는...그 곳에서 쉴 새 없이 슈팅 훈련을 했어요. 그냥 슈팅한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1번 구역' 이런 식으로 목표 지점을 설정해놓고 100번을 맞추면 끝내는' 그런 형태로 훈련을 했죠.'

'또 골키퍼들이 개인 훈련을 할 때 제가 슈팅이 좋으니까 저보고 슈팅을 해달라고 많이 부탁했어요. 저로서도 골키퍼가 막기 힘든 코스로 슈팅을 때리는 훈련을 할 수 있어서 상부상조였죠.(웃음) 그런 훈련을 통해 정확성이나 감각적인 부분이 많이 향상된 것 같습니다.'

숭실대 시절에도 노상래의 이러한 노력은 꾸준히 이어졌고' 4학년 때 만개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는 '원하는 방향으로' 차고 싶은 대로' 강하고 빠르게' 찰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것.

'4학년이 되면서 몸에 완전히 배어 감각적인 슈팅이 나오기 시작하더군요. 그 해 춘계대학연맹전 때부터 많은 골을 넣을 수 있었고' 그것이 자신감으로 이어져 한 단계 발전할 수 있었어요. 숭실대도 전국대회 우승과 4강을 한 번씩 했고' 저는 결국 대표2진에도 선발될 수 있었습니다.'

프로가 아닌 주택은행으로 진로 결정

숭실대를 졸업한 노상래가 선택한 곳은 K리그가 아니라 금융 팀이었던 주택은행이었다. 당시 노상래 뿐 아니라 많은 대어급 신인들이 실업으로 향했는데' 지금과는 달리 안정적인 직장으로서 실업이나 금융 팀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K리그에 뛰어든 완산 푸마가 재정적인 문제점을 드러낸 점도 원인 중 하나였다.

'완산 푸마에 뽑히는 것이 걱정되는 부분도 분명 있긴 있었어요. 그런데 안정적인 은행 팀으로 가는 게 낫지 않겠냐는 생각도 했었죠. 원래 기업은행으로 가려고 했는데' 4학년 때 주택은행으로 결정했습니다. 우리 동기들이 10명 정도 갔는데' 절반 정도는 아직도 잘 근무하고 있어요. 저도 프로에 가지 않았다면 은행원으로 있었을 겁니다.(웃음)'




96년 K리그에 데뷔하자마자 득점왕과 신인왕을 독차지한 노상래 ⓒKFA 홍석균



전남 창단 멤버로 K리그행..득점왕과 신인왕 차지하며 화려하게 등장

2년을 주택은행에서 보낸 노상래는 1995년에 K리그행을 결정했고' 창단 팀이었던 전남에 지명되었다. 당시 노상래와 동일한 케이스로 국민은행에서 뛰고 있던 김태영 역시 함께 전남에 입단했다.

'원래 태영이와 대학 4학년 때 알게 됐어요. 태영이가 국민은행에 들어가면서 서울로 왔거든요. 그래서 우리 집에서 지내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2년이 지나고 전남이 창단한다는 소식이 있고' 우리도 프로에 한 번 가보자고 의기투합했던 거죠.(웃음)'

데뷔 첫 해에 노상래가 보여준 센세이션은 대단했다. K리그 무대를 처음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33경기에 나서 16골-6도움을 기록' 득점왕과 신인왕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1996년에도 2년차 징크스에 빠지지 않고' 32경기에서 13골-7도움의 호성적으로 전남의 간판 공격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사실 동계훈련 기간이나 시즌 초까지만 해도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있었어요. 실제로 첫 경기에서도 좌절을 맛봤고요. 그런데 당시 고참이었던 김상호 선배나 김봉길 선배 등이 옆에서 조언을 많이 해주셨죠. 그러면서 두 번째 경기부터 잘 풀리면서 빨리 자신감을 찾을 수 있었어요.'

'솔직히 득점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학창 시절에도 상복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프로 첫 해에 득점왕과 신인상에 베스트11' 올스타전 MVP을 수상했고' 각종 언론사로부터 15개 정도의 상을 받았어요. 꿈만 같던 일이었죠.(웃음)'

'사실 공격수가 성공하려면 주위 동료들이 얼마나 해주느냐가 중요해요. 당시에 김상호 선배가 미드필드에서 볼 배급을 잘해주셨고' 김봉길 선배가 전방에서 같이 호흡을 맞추면서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죠.'




97년 열렸던 프랑스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일본전에서의 노상래 ⓒKFA 홍석균



프로에서의 상승세' 대표팀 선발로 이어져

K리그에 데뷔하자마자 센세이션을 일으킨 노상래는 대표팀에까지 발탁됐다. U-16 대표팀 이후' 대표2진에 잠시 선발됐던 것을 제외하고는 대표팀과는 인연이 없었던 터라 반가운 일이었다. 그는 박종환 감독의 부름을 받고' 96년 코리아컵 코스타리카전을 통해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그리고 코리아컵 2차전이었던 킬마녹(스코틀랜드 클럽)전에서 골을 터뜨렸고' 준결승전이었던 잠비아전에서 A매치 데뷔골까지 기록했다.

'대표1진에 뽑힌 것은 처음이었어요. 얼떨떨하고 꿈 같고 그랬죠.(웃음) 코스타리카전이 수원에서 열렸는데' 많은 관중들이 오셨죠. 정말 대단한 선배-동료들과 같이 운동장에 들어서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뛴다는 것 자체가 너무 벅찬 느낌이었어요. 그러나 플레이 자체만으로는 아쉬움이 많았죠. 좀 더 적극적으로 플레이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잠비아전에서는 선제골을 허용한 상황에서 전반 36분에 교체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들어가서 5분 만에 동점골을 넣었죠.(웃음) 아직도 기억이 나는데' 김판근 선배가 내준 패스를 받아 한 번 치고 나간 뒤에 아크 쪽에서 그대로 슈팅을 시도했어요. 사실 공간이 별로 없었는데' 골대 구석의 작은 공간으로 들어갔죠. 확률이 낮은 슈팅이었는데' 제가 지속적으로 했던 슈팅 훈련이 정말 큰 도움이 됐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었어요.'

그러나 당시 대표팀 공격진은 황선홍' 김도훈' 최용수 등이 확실하게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이들에 막혀 노상래는 주로 교체멤버로 많이 활용됐다. 그는 1997년' 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까지도 대표팀에 꾸준히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정작 프랑스 월드컵 본선 무대는 밟지 못했다.

'그 선수들은 일단 피지컬적인 면에서 좋잖아요. 저는 그 부분이 부족했죠. 그리고 그들은 골을 넣을 수 있는 위치 선정이나 기술적인 부분이 좋았어요. 선홍이 형이나 도훈이를 보면 좋은 위치 선정을 통해 정말 쉽게 골을 넣거든요. 저는 그런 부분이 부족한 대신에 페널티 에어리어 밖이라도 슈팅력을 이용해 만들어서 마무리하는 것이 많았어요.'

'제가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대표팀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조커 정도까지였다고 생각해요. 그런 부분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목표는 전남에서 10년을 뛰면서 100골과 50도움을 기록하는 것이었죠.'




전남에서 프랜차이즈 스타로 활약했던 노상래 ⓒKFA 홍석균



꾸준함의 대명사' 전남의 해결사

대표팀에서의 한계를 알았기에 노상래는 K리그에서 더 빛나길 원했다. 위에서 이야기한대로 10년 이상 뛰면서 100골-50도움을 기록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것도 그 이유였다.

실제로 그는 꾸준했다. 월드컵 예선 때문에 대표팀 차출이 많았던 1997년에 17경기에 나서 7골-3도움을 기록한 것을 제외하곤 1995년부터 1999년까지 매년 10골-6도움 이상을 해냈다. 2000년 역시 9골-5도움으로 거의 근접한 성적을 거뒀다.

'그 무렵이 저의 최전성기였죠. 무조건 두 자리 수 득점을 하면서 10년 정도 꾸준히 가자고 목표를 세웠어요. 결국 그렇게 하지는 못했지만..(웃음) 어쨌든 제가 축구를 하면서 가장 재미있게 했던 시기였습니다.'

이 무렵의 전남은 화려함에서는 조금 떨어질지 몰라도 끈끈한 조직력과 팀워크를 바탕으로 한 탄탄한 팀이었다. 그 어떤 팀도 전남을 만만하게 볼 수 없을 정도로 짜임새가 있었고' 홈이었던 광양전용구장에서의 열기도 대단했다. 팀의 간판 공격수였던 노상래를 향한 사랑도 뜨거웠다.

'다른 팀에 비해 대표 선수나 스타 선수들이 많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허정무 감독님을 중심으로 팀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정신이 있었죠. 모두들 정이 넘치고 따뜻하고 가족 같은 분위기였고요. 그렇기 때문에 운동장에서도 더 끈끈한 모습이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팬들의 열기도 대단했어요. 경기하면서 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도 자주 있었죠.(웃음) 제가 터치 라인 쪽으로 가면 '상래야~ 한 골 넣어라!'라고 하시고' 코너킥 차러갈 때도 '상래야~ 바로 골로 넣어봐라'하시면 제가 '직접 한번 차보세요'라고 농담하고...(웃음) 경기장 안에서든 밖에서든 정감 있는 분위기였죠. 예전의 그런 흥겨웠던 분위기가 요즘 광양에서는 약간 사라진 것 같다는 점이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쉬워요.'

목표였던 전남에서의 10년' 결국 채우지 못하고 대구행

2000년대에 접어들고' 나이가 30대로 들어서면서 노상래도 서서히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2000년에 37경기에 나서 9골-5도움의 준수한 성적을 거뒀지만' 2001년에는 27경기에서 5골-4도움' 그리고 2002년에는 단 6경기 출장에 그치며 공격 포인트도 제로였다.

'2000년에는 제가 프로 데뷔 이래 가장 많은 경기를 뛰긴 했지만' 만족할 만한 경기력은 보여주지 못했어요. 당시 허정무 감독님에서 이회택 감독님으로 바뀌셨는데' 그러면서 제 역할도 조금 바뀌었거든요. 저는 볼을 갖고 과감하게 플레이해야 하는 스타일인데' 볼이 있는 반대 공간에서 좀 더 스피디한 움직임을 요구하셨죠. 그게 쉽지는 않더군요.'

결국 노상래는 2003년에 새로 창단한 대구로 이적하게 됐다. 당초 노상래는 전남에서 10년을 채우고 40-40클럽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갑작스럽게 대구행이 결정되었다. 그로서도 조금은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어요. 사실 그 전에도 다른 팀에서 제의가 왔었는데' 구단에서 절대로 안 보낸다고 했었거든요. 저도 전남에서 10년 채우려는 목표가 있었고요.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대구로 가게 된 것이었죠. 그 때는 이제 축구를 그만둘 때가 됐나라는 생각까지 했었죠.'

'결과적으로는 좋았어요. 제가 대구로 가기 전까지 71골-39도움이었거든요. 40-40에 대한 욕심이 있었는데 ' 2년 가까이 도움 1개를 기록 못했어요. 대구로 이적해 선수 생활을 계속 한 것도 40-40을 해보자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대구 가자마자 도움 1개를 추가할 수 있었어요.(웃음)'

'그런 점에서 당시 대구 박종환 감독님께 감사하죠. 제가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직접 연락하셔서 당장 짐 싸서 오라고 하셨었죠. 감독님께서 불러주셨고' 저도 도움 1개는 더 추가해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기에 다시 달릴 수 있었습니다.'

창단팀이었던 전남에서 K리그 생활을 시작한 노상래는 또다시 창단팀 대구에서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하게 됐다. 어찌 보면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대구에서 그는 최고참으로서 어린 후배들을 이끌어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것이 팀에서 요구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오주포나 이경수' 김학철 등이 제 바로 아래 동생들이었어요. 이 친구들과 함께 어린 후배들을 이끌면서 나름대로 재미있게 축구를 했던 것 같아요. 저도 제가 뛰는 것보다는 후배들을 챙겨주는 것에 더 신경을 썼고요.'

대구에서의 첫 해에 노상래는 4골-1도움을 기록하며' 팀이 어려울 때 한방씩 해주는 베테랑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그러나 2004년에는 노나또나 훼이종' 진순진 등에 밀려 기회를 잡지 못했다. 노상래는 현역에서 물러나야할 시점이 다가왔음을 인식했고' 결국 그 해 8월에 은퇴를 선언했다.

'2003년에 주전은 아니었지만' 조커로 어느 정도 역할을 해냈어요. 그런데 2004년에는 다른 선수들이 제 역할을 더 잘 해낼 수 있었죠. 그런데 감독님께서 최고참인 저를 못 내보니까 미안해하시고 신경쓰시더라고요. 그래서 감독님의 짐을 덜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상의 끝에 은퇴를 결심했던 겁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대구의 1호 은퇴 선수였어요.(웃음)'

'제 선수 생활을 돌이켜보면 정말 좋은 선수는 아니었다고 해도' 저만의 장점은 확실히 가졌던 선수였다고 생각해요. 슈팅에 있어서는 한국 최고까지는 아니더라도 몇 손가락 안에는 들어가지 않을까라는 자부심도 있고요.'




인터뷰 중인 노상래 ⓒ이상헌



어린 공격수들에게 조언' 자신만의 특기를 갖춰라!

강력하면서도 정확한 슈팅으로 일가를 이뤘던 노상래가 어린 공격수들에게 조언하는 것도 '자신만의 특기를 연마하라'였다.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본인만의 무기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선수들에게 항상 이야기해요. 공격수라면 자기만이 갖고 있는 그 무엇' 다른 사람들이 이름을 듣는 순간 '아 이것만은 그 선수가 최고지'라고 떠올릴 수 있는 무기를 가지라고...동료 지도자들과도 이야기하는 부분인데' 요즘 선수들은 기량이 전체적으로 고르긴 한데' 자신만의 특징이 없거든요. 기본은 확실히 갖추되 뭔가 확실한 무기 하나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로서의 길

2004년 현역 은퇴 이후 노상래는 김희태축구센터(일동고)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고' 아주대를 거쳐 친정팀 전남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올 시즌을 앞두고' 강원에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전남 시절 그를 아끼고 챙겨줬던 김상호 감독의 요청 때문이었다.

'김희태 선생님께 배울 수 있겠다 싶어서 일동고 코치로 갔어요. 2년 정도 있다가 아주대에서 1년을 보냈죠. 그 시점에 전남에서 코치 제의가 왔어요. 전남을 떠난 후에도 광양 쪽으로 갈 때는 항상 설렘 같은 그 무엇이 있었거든요. 전남에 대한 애정과 향수가 진하기 때문이었겠죠. 제 축구 인생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고' 아이들도 모두 거기서 낳았거든요. 그래서 흔쾌히 전남으로 다시 돌아가게 됐죠.'

'그러다가 올 시즌을 앞두고 김상호 감독님께서 저를 원하셨어요. 제가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많은 조언을 해주셨고' 도움을 주셨던 분이기 때문에 꼭 한 번 같이 일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친정팀 전남을 떠나 강원으로 오게 된 것이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아직은 부족하지만' 언젠가는 K리그 팀을 맡아 제 축구를 펼쳐보고 싶다는 꿈은 있습니다. 조금씩 성장하면서 준비를 해나가야겠죠.'


글=이상헌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12년 4월호 '나의 선수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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