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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선수 시절 57] 조민국' 중거리슛 일품이던 파워 플레이어

2012-03-12 00:00:00 8,226

든든한 수비력과 강력한 중거리 슈팅으로 유명했던 조민국 ⓒ손춘근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약관의 나이에 혜성같이 등장한 홍명보는 향후 설명이 필요 없는 슈퍼스타로 성장했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사실이 있는데 홍명보도 처음에는 대체선수로 뽑혔다는 것이다. 든든한 수비력과 넓은 시야' 위력적인 중거리 슈팅을 겸비한 전천후 수비수. 홍명보가 대체해야 했던 선수가 바로 조민국(48' 현 울산 현대미포조선 감독)이다.

뚝심 있는 파워 플레이어로 대표팀의 중앙 수비를 책임졌던 조민국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김정남 감독의 황태자’로 불리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의 활약에 대표팀은 32년 만에 월드컵 진출을 확정 지으며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월드컵 본선에서는 마라도나가 이끈 아르헨티나전에 선발출장했으며' 이후 4년간 대표팀의 수비를 책임지며 ’86 아시안게임(우승)’' ’88 올림픽(2무 1패)’ 등 굵직 굵직한 대회를 치러냈다.

1986년에 데뷔한 수퍼리그(현 K리그)에서도 조민국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데뷔 첫 해 럭키금성(현 서울)을 준우승으로 이끌어 ‘베스트 11’에 선정됐으며' 1988년에는 전국축구선수권대회(현 FA컵)' 1990년에는 정규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소속팀을 강호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공격수를 압도하는 절대적인 힘과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시원한 중거리 슈팅은 팬들의 기억에 강인하게 남아있다.

둘째 형의 개인 교습' 날개를 달아준 고재욱 감독

197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조민국은 참으로 어렵게 축구를 시작했다. 축구화는 커녕 운동화조차 흔치 않던 시절' 운동화를 사기 위해서는 먼저 공부를 해야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데' 축구를 하기 위해서는 두꺼운 운동화가 필요했죠. 어머니께서 반인가' 전교인가 2등을 하면 사주겠다고 하셔서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축구공을 접해봤는데 그 기분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처음으로 두꺼운 운동화를 신은 조민국은 설레는 마음으로 축구부에 들어갔지만 동심은 오래 가지 못했다. 축구부 유니폼을 입고 처음으로 효창운동장을 찾은 날' 경기에서 졌다는 이유로 코치가 선수단 유니폼을 모두 찢어 버린 것이다. 큰 충격을 받은 조민국은 그날로 축구부를 그만뒀다.

다시 축구를 시작한 것은 중학교 때였다. 일반 중학교로 진학해 우연히 반 대항 축구대회에 참가하게 된 그는 많은 골을 넣으며 우승까지 차지했다. 담임선생님은 축구를 권유했고 조민국은 반강제로 ‘축구 동아리’에 가입했다. 정식 축구부가 아닌 ‘학도 체육대회’에 참가하는 아마추어 클럽이었다.

“방과 후에 운동을 하러 갔는데 분위기가 안 좋더라고요. 단체생활을 처음 해보는 건데 분위기도 거칠고 선배들이 담배 피고 때리는 것을 봤죠. 불량 서클에 들어간 것 같아서 이틀 만에 다시 나왔어요.”

축구팀과의 악연에도 불구하고 축구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동생의 재능을 알아본 둘째 형이 개인교습에 나섰기 때문이다. 축구부 출신이던 둘째 형은 기본기 훈련을 시켰고 급기야 동생을 축구부가 있는 학교로 전학을 보냈다. 그는 왕복 4시간 이상이 걸리는 통학을 이겨내 중동고에 진학할 수 있었다.

중동고에서의 생활도 만만치 않았다. 축구를 늦게 시작한 그는 기본기뿐만 아니라 체력이나 체격도 갖춰지지 않았다. 2학년 때까지도 후보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축구는 재미가 없었다. 축구를 그만두고 다시 공부를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변화가 왔다.

“작은 키는 아니었는데 너무 호리호리했어요. 바람 부는 날은 공 차기가 너무 싫었을 정도로 힘이 없었죠. 고3 올라갈 때 다쳐서 3개월을 쉰 적이 있는데' 그때 체중도 불고 몸이 많이 좋아졌죠. 친구들이 몰라볼 정도였으니까…”

“고2 말에 고재욱 감독님께서 새로 오셨어요. 그때부터 운동이 재미있어졌죠. 게임에 어울릴 수 있게 해주니까 너무 즐거웠고 잠자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잘 때마다 ‘빨리 일어나야 되는데…’했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고재욱 감독과의 만남으로 조민국의 축구 인생은 180도 바뀌었다.




대표팀 시절의 조민국 ⓒ월간축구



일사천리로 이어진 고려대 진학' 대표팀 발탁

전학이냐' 공부냐를 두고 고민하던 조민국은 고재욱 감독 밑에서 새로운 선수로 거듭났다. 몸에는 힘과 함께 재미도 붙었다. 그는 가능성을 인정받아 고려대로 진학했다.

“저와는 거리감이 있는 학교였어요. 진학이 결정됐을 때 ‘내가 이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죠. 가문의 영광이지만 이상했어요. 잊지도 않는 것이 처음에 34~35명이 큰 방에 모였는데 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 나오는 선배들이었어요. 얼굴도 못 쳐다봤고 ‘내 앞에 있는 게 현실이냐' 잘못된 것이냐’ 생각했죠.”

그는 고려대에서도 촉망 받는 유망주였다. 신입생이지만 쟁쟁한 선배들 틈에서 주전으로 활약했다. 선배들에게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만 뛰던 시기였다. 결국 그는 최은택 감독의 눈에 띄어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대학교 1학년 6월 3일' 효창운동장에서 발목이 부러지는 큰 부상을 당했어요. 골도 많이 넣고 하니까 상대방에게는 부담스러운 선수였나 봐요. 골키퍼가 일방적으로 덮치더라고요. 병원에 있는데 대표팀 선발 소식을 들었죠. 저도 참 이상했어요.”

조민국은 두 차례의 수술로 10개월을 쉬어야 했다. 체계적인 재활 프로그램도 없던 때라 복귀도 순탄치 않았다. 간신히 조깅을 시작할 시기에 팀의 무리한 요구로 경기에 투입되기도 했다. 그러나 조민국은 자신도 놀랄 정도의 맹활약을 펼쳤고' 조윤옥 감독은 그를 대표팀으로 불렀다.

“데뷔전은 동대문운동장이었어요. 이탈리아 클럽팀(제노아)과 경기였는데 선발로 넣으시더라고요. 도중에 페널티킥이 났는데 저보고 차라고 하시는 거에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상황이니까 안 찬다고 할 수도 없었고. 세게 차야겠다 해서 강하게 찼는데 크로스바에 정확히 맞고 센터서클까지 날아가는 거에요. 다시 수비하느라 관중들도 웃었던 기억이 나요.(웃음)”

대학교 2학년이던 1983년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았지만 주축선수로 올라선 것은 ‘멕시코월드컵’ 예선이 시작된 1985년이었다. 강력한 킥력과 넓은 시야' 탄탄한 체구를 바탕으로 힘 있는 플레이를 구사하던 그는 대학무대를 평정한 실력으로 대표팀에서도 여러 포지션을 맡았다. ‘멕시코 월드컵’으로 인해 수비수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대학에서의 그는 공격력이 뛰어난 미드필더였다.




86 멕시코 월드컵 아르헨티나전에 나선 조민국(왼쪽에서 4번째) ⓒ월간축구



“마라도나? 곰 인줄 알았어”

세대교체의 바람을 타고 대표팀 주전자리를 꿰찬 조민국은 수비수로 활약하며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행을 이끈 장본인이다. 어린 나이에 스위퍼라는 중책을 맡아 든든한 후방을 구축했고' 때로는 공격에 가담해 시원한 골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김정남 감독(당시 대표팀 감독)의 황태자’라는 말까지 있었다.

‘1986 멕시코 월드컵’은 디에고 마라도나를 위한 대회였다. 마라도나가 이끈 아르헨티나는 이 대회에서 우승컵을 거머쥐었고' 마라도나는 역대 최고 선수 반열에 올라섰다. 우리의 첫 경기 상대가 바로 아르헨티나였다.

“라커룸에서 마라도나를 처음 봤을 때' 큰 곰 인줄 알았어요. 워낙 체격이 좋아서. 그런데 공을 너무 잘 차더라고요. 방향전환이 너무 빨라서 도저히 예측이 안 됐어요. 그런 선수 처음 봤죠.”

“저는 스위퍼니까 마라도나를 멀리서 봤죠. 제 앞까지는 별로 못 온 것 같아요. 선배들이 태클을 해서…(웃음) 솔직히 지금 룰대로 했다면 우리 수비수들은 다 퇴장이에요. 거의 싸움이었으니까. 그런데 심한 태클을 당하면서도 계속 일어나더라고요. 너무 신기했어요.”

32년 만에 월드컵 무대를 밟은 우리 대표팀은 아르헨티나에 1-3으로 패했다. 마라도나에게 골을 내주지 않았고 박창선이 만회골(월드컵 첫 골)을 넣었지만 일방적으로 밀린 경기 내용에 선수들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스위퍼를 맡았던 조민국은 아르헨티나전 3실점의 책임으로 2차전(불가리아전)에 선발출장하지 못했다.

“조영증(현 파주NFC센터장) 선배가 있기도 했고' 세 골을 먹었다는 자체가 최종수비수의 책임이 있었죠. 마라도나 잡는다고 다른 사람에게 세 골을 먹었으니…”

“기량에서 차이가 났어요. 개인 기량의 차이는 작았지만' 작은 것이 합쳐지면서 큰 파도나 산이 되는 것처럼 전술적인 차이가 컸죠. 경험이 없었으니까요.”

대표팀은 불가리아와 1-1로 비겼고' 이탈리아를 상대로는 2-3으로 패했다. 조민국은 이탈리아전에는 아예 나서지 못하며 다음 대회를 기약해야 했다.




럭키금성(현 서울) 시절의 조민국 ⓒ월간축구



중거리 슛의 황제' 영원한 LG맨

월드컵이 열리던 1986년 대학교를 졸업한 조민국은 당대 최고의 신인으로 손꼽히며 럭키금성에 입단했다. 당시 최고의 스타이던 최순호(전 강원 감독)와 함께 고액연봉자의 명단에 항상 이름을 올릴 정도였다. 그만큼 실력도 대단했다.

“월드컵' 아시안게임(우승)을 치르느라 하반기가 돼서야 프로 데뷔전을 치렀어요. 월드컵까지 다녀왔으니 너무 쉬웠죠. 데뷔전부터 시작해서 연달아 두 골씩 넣었거든요. 마라도나가 당했던 태클을 제가 당했죠.(웃음) 슈팅력이 워낙 좋으니까 태클이 상당히 많이 들어왔어요.”

어렸을 때부터 공을 차는 것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조민국은 특히 중거리 슈팅에 일가견을 보였다. 1986년 프로에 데뷔해 7년간 뛰면서 15골을 기록했는데 페널티박스 안에서 넣은 골이 없을 정도로 중거리 슈팅이 대단했다. 프로 데뷔 첫 해에는 ‘수퍼리그(현 K리그) 베스트 11’에도 뽑혔다.

“축구선수로서 팬들의 기억에 남긴 것이 킥력이에요. 남들이 10~20m 패스를 할 때' 저는 30~40m 패스를 했으니까. 저는 김주성(현 KFA 국제국장)처럼 치고 달리는 스타일이 아니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전국축구선수권(현 FA CUP) 결승전(1988년)이에요. 대우(현 부산)가 워낙 강한 시기였는데 크리스마스 이브 날 재경기를 했거든요. 대표팀 사우디 원정을 다녀오느라 컨디션이 엉망이었는데' 당시 감독대행이시던 고재욱 선생님께서 투입을 시키셨어요. 한 골을 먹으니까 화가 나더라고요. 올라가서 동점골 어시스트하고 결승골까지 넣었죠. 현재 대표팀 코치인 김풍주 골키퍼를 상대로 40m 거리에서 넣었을 거예요.(웃음)”

K리그에서 139경기를 뛴 그는 1989년 무렵 무릎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시 국내의 의료 장비로는 부상의 원인이 발견되지 않았고' 참고 뛸 수 밖에 없었다. 참다 못한 조민국은 일본으로 건너가 진료를 받았고 무릎 연골이 찢어진 사실을 알게 됐다. 이듬해 1월 수술대에 올라야 했다.




88 서울 올림픽에서 소련(현 러시아)과 맞붙은 조민국 ⓒ월간축구



’86 멕시코 월드컵’ 이후 부동의 스위퍼를 지키던 그가 쓰러지자 대표팀에도 비상이 걸렸다. 수술 경과가 좋아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도 참가했지만 사실상 경기력이 떨어진 상태였다. 그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긴급하게 수혈된 선수가 20세의 홍명보(현 올림픽대표팀 감독)였다.

“축구를 하면서 가장 큰 실수가 이탈리아 월드컵에 나간 거예요. 수술 회복 후 몸을 만드는 시기였는데 대표팀에 발탁이 됐죠. 안 가겠다고 거부하니까 징계를 하겠다고 했고' 무엇보다 고재욱 감독님께서 설득을 하셨어요. 최고의 몸이 아닌 상태로 대표팀에 들어가는 게 자존심이 허락을 안 했어요.”

그는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45분(벨기에전' 0-2패) 출전에 그쳤고' 대표팀은 3전 전패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월드컵을 다녀온 그는 소속팀 럭키금성에 우승컵을 안겼지만 상승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럭키금성은 이듬해 LG 치타스로 팀명을 바꿨고 최하위로 떨어졌다. 팀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낀 조민국은 과감한 선택을 한다.

“내 자리가 아니라고 느끼면 미련 없이 그만두는 성격이에요. 남에게 부담을 주거나 싫은 소리를 못합니다. 그때 LG 감독이 고재욱 감독님이셨는데' 저로 인해 감독님이 부담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만두고 일본으로 갔습니다.”

“국내 다른 팀으로 이적할 수도 있었지만' 한 곳에 묻으면 끝을 봐야 된다고 생각을 했어요. 자존심이었죠. 돈을 떠나서 팀에 대한 자긍심이 상당히 강했어요. 나를 위해 뛰는 게 아니라 팀을 위해 최선을 다했죠.”

당시 일본 2부리그에 있던 후제다 부룩스(Fujieda Blux' 현 아비스파 후쿠오카)에서 1년간 선수 생활을 한 조민국은 K리그로 복귀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실제로 영입제의를 받기도 했지만 더 이상 프로에서 뛰지는 않았다. 결국 조민국은 럭키금성에서만 선수생활을 마무리한 ‘원클럽맨(One club man)’으로 남았다.

그는 대표팀에서도 1991년 열린 한일정기전(1-0승)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은퇴하기에는 조금 이른 29세의 나이였지만 선택은 언제나 과감했다. 요행을 바라기보다는 언제나 ‘정면 돌파’를 선택했던 강직한 성격은 그의 선수 생활을 이끈 원동력이었다.


글=손춘근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12년 2월호 '나의 선수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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